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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건국과 체제 정비 918~1018년
후삼국을 통일하고 광종·성종 때 나라의 틀을 갖춘 고려
핵심 정리
- 장수들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세워 철원에서 고려가 시작되었고, 이듬해 도읍을 송악(개경)으로 옮겼습니다 (918~919)
- 고려는 신라의 항복을 받고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를 무너뜨려 후삼국을 통일했습니다 (935~936)
- 태조 왕건은 호족의 딸과 혼인하고 왕씨 성을 내려 주어 호족을 끌어안았고, 사심관·기인 제도로 그들을 붙잡아 두었습니다
- 광종은 노비안검법(956)과 과거제(958)로 호족의 힘을 누르고, 고려만의 연호를 써 황제의 나라임을 내세웠습니다
-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12목에 처음 지방관을 보냈고(983), 이어 현종 때 고려는 4도호부·8목을 중심으로 지방 제도를 다시 다듬었습니다 (1018)
궁예를 몰아내고 세운 나라
9세기 말 신라는 오랜 왕위 다툼과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며 힘을 잃었습니다. 지방에서는 성을 쌓고 군사를 거느린 호족(지방의 힘 있는 세력)이 저마다 고을을 다스렸습니다. 이런 가운데 견훤이 후백제를,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면서 신라와 함께 세 나라가 맞서는 후삼국 시대가 열렸습니다.
궁예는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미륵불(앞날에 나타나 사람들을 구한다는 부처)이라 하며, 남의 속마음을 읽는다는 관심법을 내세워 신하는 물론 부인과 아들까지 죽이자 사람들의 마음이 떠났습니다. 918년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같은 장수들이 궁예를 몰아내고, 궁예 밑에서 여러 싸움에 큰 공을 세운 송악 출신 장수 왕건을 왕으로 받들었습니다. 궁예는 달아나다 목숨을 잃었고, 왕건은 철원의 태봉 도성1에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고구려를 잇는다는 뜻으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천수라는 연호(임금이 다스린 해를 세는 이름)를 정했습니다.
이듬해인 919년 왕건은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습니다. 예성강 어귀에 가까운 송악은 바닷길 무역으로 힘을 키운 왕건 집안의 근거지였습니다. 이곳이 바로 개경2으로, 몽골과 싸우며 강화도로 옮겨 갔던 때(1232~1270)와 고려 말 잠시 한양으로 옮겼던 때를 빼면 고려가 망할 때까지 수도였습니다.
후삼국을 하나로
왕건은 힘으로만 밀어붙이지 않았습니다. 여러 지방 호족의 딸과 혼인하고 왕씨 성을 내려 주며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신라에는 너그럽게 대했습니다. 927년 견훤이 신라의 도읍 금성(지금의 경주)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게 하자, 왕건은 신라를 도우러 나섰습니다. 그러나 공산(지금의 대구 팔공산 일대)에서 장수 신숭겸을 잃을 만큼 크게 졌습니다. 고려는 930년 고창(지금의 안동) 싸움에서 이기면서 다시 흐름을 잡았습니다.
935년 후백제에서는 집안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맏아들 신검이 아버지를 금산사에 가두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견훤은 몰래 빠져나와 고려에 몸을 맡겼습니다. 같은 해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김부)도 나라를 들어 고려에 항복했습니다. 고려의 첫 임금인 태조 왕건은 신라를 없애 그 땅을 경주3라 하고, 김부를 그곳의 사심관(고향 고을의 일을 책임지게 한 자리)으로 삼았습니다. 공신(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들도 이를 본떠 저마다 고향의 사심관이 되면서 사심관 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심관은 고을에 탈이 나면 책임을 져야 했으므로, 이 제도는 나라가 지방 세력을 붙잡아 두는 끈이 되었습니다.
936년 태조는 견훤을 앞세우고 후백제로 나아갔습니다. 두 군대는 일선군(지금의 구미 선산)의 일리천4을 사이에 두고 맞섰습니다. 고려군의 기세가 드높은 데다 옛 임금 견훤까지 고려 편에 서 있자, 후백제 장수들이 잇따라 무기를 내려놓아 고려군이 크게 이겼습니다. 황산(지금의 논산 연산)으로 달아난 신검도 끝내 항복하면서 후백제는 무너졌고, 후삼국은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후백제가 망하자 견훤은 근심 끝에 병을 얻어 며칠 만에 황산의 한 절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논산에는 견훤의 무덤5으로 전해 오는 곳이 있습니다. 태조는 신검의 항복을 받은 곳에 개태사6를 짓기 시작해 940년에 마쳤고, 절 뒤에 있는 산의 이름도 황산에서 '하늘이 보호한 산'이라는 뜻의 천호산으로 고쳤습니다.
호족을 아우른 태조의 다스림
통일 뒤에도 지방 호족의 힘은 여전히 셌습니다. 태조는 사심관 제도와 함께, 호족의 아들을 개경에 머물게 하는 기인 제도를 두었습니다. 자식이 왕 곁에 있으면 호족이 함부로 딴마음을 품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또 세금을 줄여 오랜 전쟁에 지친 백성의 살림을 돌보았습니다.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을 서경으로 삼아 북쪽으로 땅을 넓히려 했고(북진 정책), 거란에 멸망한 발해의 유민(나라가 망한 뒤 남은 백성)도 받아들였습니다.
태조는 불교를 나라를 지키는 힘으로 여겨 절과 이름난 승려를 아꼈습니다. 원주 흥법사7의 진공대사 충담이 940년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그를 기리는 비문을 손수 지었습니다. 왕이 직접 승려의 비문을 지은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943년 태조는 뒤를 이을 왕들이 지켜야 할 가르침을 적은 훈요 10조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 개경 서쪽 만수산 기슭의 현릉8에 묻혔습니다. 그 뒤 혜종과 정종 때에는 외척(왕비 쪽 친척)과 공신들이 왕위를 두고 다투어 왕권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광종과 성종, 나라의 틀을 세우다
949년 왕위에 오른 광종은 호족의 힘을 누르는 데 힘썼습니다. 956년에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해, 본래 양인(노비가 아닌 평민)이었는데 전쟁 통에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가려내 다시 양인으로 돌려놓았습니다. 노비를 많이 거느린 호족은 힘이 줄었고, 나라는 세금을 내고 군역(군대에 나가는 의무)을 질 사람을 더 얻었습니다. 같은 해 개봉9에 도읍을 둔 중국 후주의 사신을 따라 쌍기가 고려에 왔다가 병이 나서 남게 되었습니다. 광종은 그를 신하로 삼고, 958년 그의 건의에 따라 처음으로 과거(시험으로 관리를 뽑는 제도)를 치르면서 시험을 주관하는 일도 그에게 맡겼습니다. 집안 배경보다 실력으로 관리를 뽑아, 왕을 따르는 새 인재를 키우려는 것이었습니다.
광종은 또 고려를 황제의 나라로 내세웠습니다. 광덕·준풍 같은 고려만의 연호를 쓰고, 개경을 황제의 도읍이라는 뜻에서 황도라 부르게 했습니다. 청주에 남아 있는 용두사 터 철당간10(절 앞에 깃발을 걸던 쇠 기둥)에 준풍 3년(962)에 세웠다는 글이 새겨져 있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광종은 관리의 옷 색깔을 등급에 따라 정한 공복 제도를 만들었고, 뜻을 거스르는 공신과 호족을 많이 숙청(반대하는 세력을 없앰)했습니다.
981년 왕위에 오른 성종은 최승로가 올린 시무 28조(나라가 서둘러 할 일을 적은 글)를 받아들여 유교를 정치의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983년에는 해주11를 비롯한 12목에 처음으로 목사라는 지방관을 보내, 나라의 힘이 지방에 직접 닿게 했습니다. 중앙에는 나랏일을 나누어 맡는 2성 6부의 관청을 갖추었고, 992년에는 개경에 나라의 가장 높은 교육 기관인 국자감을 세워 인재를 길렀습니다.
지방 제도는 현종 때 한 번 더 손질되었습니다. 거란과의 전쟁이 이어지던 1018년, 고려는 4도호부(지방을 다스리고 지키는 큰 거점)와 8목을 두고, 이들이 그 아래 고을들을 나누어 맡게 했습니다. 12목의 하나였던 해주가 안서도호부가 되고, 화주에 처음 두었던 안변도호부를 동북쪽 국경 지대인 동계의 등주(지금의 안변)12로 옮긴 것도 이때입니다. 안변이라는 땅 이름은 이 도호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려는 건국 100년 만에 중앙과 지방을 잇는 나라의 틀을 갖추었습니다.
연표
- 918년 장수들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이 철원에서 왕위에 올라 고려를 세움
- 919년 송악(개경)으로 도읍을 옮김
- 935년 견훤이 고려에 몸을 맡기고, 신라 경순왕이 항복함
- 936년 일리천 전투 승리, 신검의 항복으로 후삼국 통일
- 943년 태조가 훈요 10조를 남기고 세상을 떠남
- 958년 광종이 쌍기의 건의로 처음 과거를 실시함
- 983년 성종이 12목에 처음 지방관(목사)을 보냄
- 1018년 현종 때 4도호부·8목을 중심으로 지방 제도를 다시 정비함
이 단원의 장소
- 1
고려 건국지, 태봉 도성 터 (철원 풍천원, 비무장지대 안)
『삼국사기』·『고려사』에 따르면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하며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관심법으로 신하는 물론 부인과 아들까지 죽였고, 장수들이 왕건을 추대하자 달아나다 죽었다. 왕건은 고구려를 잇는다는 뜻을 담아 나라 이름을 고려라 했으며, 이듬해(919) 도읍을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개경)으로 옮겼다.
- 2
개경 (지금의 개성)
송악의 호족 출신인 왕건은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한 뒤 919년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고, 송악산 남쪽 기슭에 정궁(지금의 만월대 터)을 세웠다. 개경은 강화 천도기(1232~1270)와 고려 말 우왕 때(1382~1383)·공양왕 때(1390~1391) 잠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던 두 차례를 빼고 고려가 멸망한 1392년까지 수도였으며, 만월대를 비롯한 개성역사유적지구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 3
경주 (고려의 동경, 경주읍성 일대)
『고려사』에 따르면 태조는 신라국을 없애 경주로 삼고 김부에게 이 지역 부호장 이하 향리의 일을 맡겼으며, 이를 본받아 공신들도 저마다 출신 지역의 사심관이 되었다. 사심관 제도는 중앙이 지방 호족을 통제하는 수단이었고, 경주는 987년(성종 6) 동경이 되어 개경·서경과 함께 고려의 3경으로 꼽혔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 영어 위키백과 · 국가유산포털
- 4
선산 (당시 일선군, 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두 군대는 일선군의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맞섰는데, 귀순한 견훤까지 앞세운 고려군의 기세에 눌려 후백제 장수들이 잇따라 항복하면서 고려군이 압승했고, 달아난 신검도 곧 항복해 후백제는 멸망했다. 일리천은 이 고을을 지나는 낙동강 또는 그 지류로 보지만 정확한 싸움터에는 견해가 갈린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 영어 위키백과
- 5
논산 견훤왕릉 (전 견훤묘,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삼국사기』는 견훤이 후백제가 망하자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 며칠 만에 황산(지금의 논산 연산 일대)의 절에서 죽었다고 전한다. 연무읍 금곡리 언덕의 이 무덤은 견훤의 무덤으로 전해 오며, 그가 죽기 전 도읍이던 완산(전주)이 바라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목록 ·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 (憂懣發疽 數日卒於黃山佛舍)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6
개태사지 (논산 연산면 천호리)
개태사는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에게서 항복을 받은 곳에 세운 절로, 태조는 절 뒤의 산 이름을 황산에서 '하늘이 보호한 산'이라는 뜻의 천호산으로 고쳤다. 고려 말 왜구의 약탈로 쇠퇴해 조선 때 폐사되었고, 1930년대에 옛 절터 남쪽 약 300m 지점에 다시 세운 지금의 개태사에 보물인 석조여래삼존입상과 커다란 쇠솥(철확)이 전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 국가유산포털
- 7
원주 흥법사지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진공대사 충담이 940년(태조 23)에 입적하자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을 짓고, 최광윤이 당 태종의 글씨를 모아 새겼다. 깨진 비 몸돌 조각과 진공대사의 승탑·석관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거북 모양 받침돌과 머릿돌은 지금도 원주 흥법사지에 남아 있다.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목록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인문학 · 한국교육신문 · 위키백과 · 위키백과 2
- 8
태조 왕건릉 (현릉, 개성 서쪽 만수산 기슭)
왕건의 관은 거란과 몽골이 쳐들어왔을 때 여러 차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돌아왔으며, 1992년 북한이 무덤을 고쳐 쌓기 시작할 때 봉분 뒤에서 왕건의 청동상이 발견되었다. 2013년 '개성 역사 유적 지구'의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올랐다.
- 9
개봉 (후주·북송의 도읍, 오늘날 중국 허난성 카이펑)
쌍기는 956년 후주의 사신 설문우를 따라왔다가 병으로 고려에 머물렀고, 광종은 그를 신하로 삼아 958년 그의 건의로 과거제를 처음 시행하며 그를 시험관인 지공거로 삼았다. 개봉은 960년 후주를 이은 송(북송)의 도읍으로도 이어졌다.
- 10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청주 상당구 남문로, 도심)
당간은 절 앞에 깃발(당)을 걸던 기둥으로, 이 철당간은 원래 철통 30개를 이어 세웠으나 지금은 20개가 남아 있다. 명문의 '준풍'은 광종이 960년부터 쓴 연호로, 광종은 앞서 '광덕'이라는 연호도 썼고 개경을 '황도'라 부르게 하는 등 고려를 황제국으로 내세웠다.
- 11
해주 (황해남도 해주시)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983년 양주·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승주·해주·황주에 12목을 두고 목사를 파견했다. 해주 출신 최충은 문종 때 문하시중을 지낸 뒤 사학인 9재 학당(문헌공도)을 세워 '해동공자'로 불렸다.
- 12
안변 (고려의 등주, 지금의 북한 강원도 안변군 안변읍)
995년(성종 14) 화주에 처음 두었던 안변도호부를 1018년 등주로 옮기면서 등주는 동북쪽 국경 지대인 동계의 큰 고을이 되었고, 그 이름은 조선의 안변도호부를 거쳐 지금의 안변군으로 이어진다. 고려는 북쪽 국경의 북계와 동계를 양계라 하여, 일반 행정 구역인 5도와 달리 병마사가 다스리는 군사 구역으로 두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 영어 위키백과
참고한 자료
- 『고려사』 세가(태조·광종·성종·현종), 지리지, 선거지(사심관)
- 『삼국사기』 열전 견훤
-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의 성립과 통치 체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심관·일리천 전투·개태사·안변도호부·안서도호부·해주 항목)
- 디지털 인문학 위키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 국가유산포털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논산 개태사지, 전 견훤묘)
-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성 역사 유적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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