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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여진과의 전쟁 993~1126년

거란의 세 차례 침입을 막아 내고 여진을 정벌한 고려

핵심 정리

이 단원의 장소: 1 안융진 (청천강 하류 남쪽,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문덕 일대), 2 서희 묘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후리), 3 흥화진 (지금의 평안북도 피현군 백마산성으로 추정), 4 통주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동림 일대), 5 곽주 (지금의 평안북도 곽산군 곽산읍 일대), 6 나주 (고려 나주목의 중심, 나주목 관아 일대), 7 서울 진관사 (은평구 진관동), 8 낙성대 (강감찬 생가 터, 서울 관악구 봉천동), 9 귀주 (평안북도 구성), 10 도련포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광포 일대로 추정), 11 함주 (지금의 함흥), 12 파주 윤관 장군 묘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1234567·8·129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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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의 담판과 강동 6주

10세기 초 만주 서쪽 초원에서 나라를 세운 거란은 926년 발해를 무너뜨렸고, 뒤에 나라 이름을 요라 했습니다. 고구려를 잇는다고 내세운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경계하며 중국의 송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송과 맞서던 거란은 뒤를 든든히 하려고 먼저 고려를 누르기로 하고, 993년 장수 소손녕을 앞세워 쳐들어왔습니다(1차 침입). 거란군은 청천강 남쪽의 군사 기지인 안융진1을 공격했지만, 대도수 등이 지키는 고려군에게 막혀 더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거란군의 발이 묶이자 서희가 적진으로 가 소손녕과 담판, 곧 마주 앉아 따지는 협상을 벌였습니다. 소손녕은 고려가 신라 땅에서 일어난 나라이니 고구려의 옛 땅은 거란의 것이라며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서희는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의 옛 땅"이어서 나라 이름도 고려라 했다고 맞받았습니다. 또 두 나라가 오가지 못하는 것은 압록강 가를 여진 부족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니, 그 땅을 고려가 되찾으면 거란과도 교류할 수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 교류하기로 약속하자, 거란은 그 대신 압록강 동쪽 땅을 고려가 차지하도록 인정하고 물러갔습니다. 서희는 994년부터 그곳의 여진을 몰아내고 여섯 고을에 성을 쌓았는데, 이를 강동 6주라 합니다. 큰 싸움 없이 오히려 땅을 넓힌 이 담판은 지금도 뛰어난 외교로 꼽힙니다. 서희는 998년 세상을 떠나 지금의 경기도 여주에 묻혔고, 그곳에 서희 묘2가 남아 있습니다.

강조의 정변과 두 번째 침입

그 무렵 개경의 궁궐은 어지러웠습니다.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왕위를 이을 대량원군을 억지로 승려로 만들고 자객까지 보냈습니다. 삼각산(지금의 북한산) 신혈사에 머물던 대량원군은 승려 진관이 불단 아래 땅굴에 숨겨 준 덕분에 살아났다고 전합니다. 1009년 병든 목종이 김치양을 막으려고 부른 장수 강조는 김치양 무리를 없애고 목종까지 몰아낸 뒤 대량원군을 왕으로 세우니, 그가 현종입니다. 이처럼 군사를 일으켜 권력을 뒤집는 일을 정변이라 합니다. 강조는 쫓겨난 목종의 목숨까지 빼앗았습니다.

1010년 거란 황제 성종은 강조가 임금을 죽인 죄를 묻겠다며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2차 침입). 강동 6주의 하나인 흥화진3에서는 양규가 거듭된 항복 요구를 물리치고 성을 지켜 냈습니다. 그러나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통주4 남쪽에 진을 친 강조는 처음 몇 번 이기자 방심하다가 기습을 받아 사로잡혔고, 거란의 신하가 되라는 요구를 거부하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흥화진의 양규는 군사 700여 명을 이끌고 나와 아직 버티던 통주성에서 1,000명을 더 모은 다음, 밤에 거란군이 차지한 곽주5를 기습해 성을 되찾고 백성 7천여 명을 구해 냈습니다. 그사이 거란군이 개경으로 다가오자, 현종은 항복하지 말고 잠시 피하자는 강감찬의 말을 따라 개경을 떠나 1011년 정월 멀리 나주6까지 내려갔습니다. 거란군은 비어 있는 개경을 불태웠습니다.

현종이 거란 황제를 직접 찾아가 예를 올리겠다고 약속하자(이를 친조라 합니다) 두 나라는 싸움을 멈추기로 했고, 거란군은 물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양규는 돌아가는 적을 잇달아 쳐서 끌려가던 백성 3만여 명을 되찾았지만, 애전 싸움에서 장수 김숙흥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그해 현종은 자신을 숨겨 준 승려의 은혜를 갚으려고 신혈사 자리에 큰 절을 세우고, 그 승려의 이름을 따 진관사7라 했습니다.

귀주 대첩과 천리장성

현종은 친조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돌려 달라는 거란의 요구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1018년 겨울 거란 장수 소배압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습니다(3차 침입). 고려군을 이끈 상원수, 곧 총사령관은 일흔 살 무렵의 강감찬이었습니다. 서울 관악구의 낙성대8는 '별이 떨어진 터'라는 뜻으로, 948년 그가 태어날 때 큰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이 전하는 생가 터입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강감찬은 흥화진 근처의 큰 냇물을 쇠가죽으로 막아 두었다가, 거란군이 건널 때 터뜨리고 숨겨 둔 군사로 공격해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소배압은 개경 가까이까지 내려왔지만, 고려가 성 밖의 백성을 성 안으로 들이고 들판을 비운 채 굳게 지키자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물러나야 했습니다. 1019년 2월 강감찬은 돌아가는 거란군을 귀주9에서 에워싸 크게 무찔렀습니다. 『고려사』는 살아 돌아간 거란군이 겨우 수천 명이었다고 적었습니다. 크게 이긴 싸움이라 하여 이를 귀주 대첩이라 부릅니다.

그 뒤 두 나라는 화해했고, 강동 6주는 끝내 고려 땅으로 남았습니다. 고려·송·거란 세 나라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오랜 평화가 이어졌습니다. 고려는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 둘레에 바깥 성인 나성을 쌓아 1029년에 완성했습니다. 또 1033년부터 1044년까지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의 도련포10까지 천 리가 넘는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윤관의 9성과 금나라의 등장

한반도 동북쪽과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은 오랫동안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부르며 말과 모피를 바치고, 곡식과 옷감을 얻어 갔습니다. 그런데 12세기 초 완옌부가 여러 여진 부족을 하나로 묶으며 천리장성 가까이까지 세력을 넓혔습니다. 1104년 고려군이 기병이 강한 여진군에게 잇달아 지자, 고려는 윤관의 건의에 따라 말을 탄 신기군, 걸어서 싸우는 신보군, 승려로 이루어진 항마군을 묶어 특별 부대 별무반을 만들었습니다.

1107년 윤관은 별무반을 앞세운 17만 대군으로 여진을 몰아내고 이듬해까지 동북 지방에 9성을 쌓았습니다. 그 가운데 지금의 함흥으로 보는 함주11에는 이 지역을 다스리는 대도독부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삶의 터전을 잃은 여진은 거듭 쳐들어오는 한편, 다시는 침입하지 않고 해마다 예물을 바치겠으니 땅을 돌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멀리 떨어진 성들을 지키기도 어려워 고려는 1109년 9성을 여진에 돌려주었습니다. 9성이 어디까지 뻗어 있었는지는 지금도 학자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윤관은 1111년 세상을 떠나 경기도 파주의 윤관 장군 묘12에 묻혔습니다.

여진은 그 뒤 더욱 강해졌고, 1115년 완옌부의 아구다가 지금의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근처의 회령13을 도읍으로 삼아 금을 세웠습니다. 금은 1117년 자신을 형, 고려를 아우라 일컫는 글을 보내왔고, 1125년 거란(요)을 무너뜨린 뒤에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맺고 큰 나라로 섬기라는 사대를 요구했습니다. 1126년 왕의 외척(어머니나 왕비 쪽 친척)으로 권력을 쥐고 있던 이자겸은 전쟁을 피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이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한때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받들던 여진을 섬기게 되자 불만이 커졌고, 이는 뒷날 승려 묘청 등이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연표

  1. 993년 거란 1차 침입, 안융진 싸움 뒤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음
  2. 1010년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거란 2차 침입, 흥화진·통주·곽주 싸움
  3. 1011년 개경이 불타고 현종은 나주로 피란, 양규 전사, 진관사 세움
  4. 1019년 강감찬의 귀주 대첩 (3차 침입은 1018년 겨울)
  5. 1044년 천리장성 완성 (1033년 시작)
  6. 1107년 윤관이 별무반으로 여진 정벌, 이듬해까지 동북 9성을 쌓음 (1109년 반환)
  7. 1115년 여진의 아구다가 금을 세움
  8. 1126년 이자겸 정권이 금의 사대 요구를 받아들임

이 단원의 장소

  1. 1

    안융진 (청천강 하류 남쪽,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문덕 일대)

    993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안융진은 광종 때인 973년 청천강 남쪽 연안에 쌓은 진성으로, 993년 이곳에서 대도수 등이 소손녕의 공격을 막아 거란군의 남하를 멈추게 했다. 뒤이어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거란과 교류하기로 하는 대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 위키백과 · 우리역사넷 · 영어 위키백과 · 위키백과 2

  2. 2

    서희 묘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후리)

    998년 · 난이도 ★★★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이은 나라라며 고구려 옛 땅을 내놓으라는 거란의 요구를 물리치고, 여진이 가로막아 거란과 교류하지 못한다는 논리로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얻어 냈다. 998년 세상을 떠난 그는 지금의 여주에 묻혔다.

    출처: 위키백과 · 세계일보

  3. 3

    흥화진 (지금의 평안북도 피현군 백마산성으로 추정)

    1010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흥화진은 서희의 담판 뒤 995년에 쌓은 강동 6주의 하나로, 1010년 양규가 거란 대군의 포위를 견뎌 냈고 1018년에는 강감찬이 쇠가죽으로 막아 둔 냇물을 터뜨리는 수공으로 거란군을 무찔렀다. 정확한 성터는 학설이 갈리는데, 의주 남쪽 피현군의 백마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 위키데이터 · 참고 자료

  4. 4

    통주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동림 일대)

    1010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강조는 1009년 정변으로 목종을 몰아내고 현종을 세웠는데, 거란은 이를 구실로 쳐들어왔다. 통주성 남쪽 삼수채에 진을 친 강조는 초반 승리에 방심하다 기습을 받아 사로잡혔고 거란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다 죽임을 당했지만, 통주성은 끝까지 버텼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 참고 자료 · 영어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2

  5. 5

    곽주 (지금의 평안북도 곽산군 곽산읍 일대)

    1010년 · 난이도 ★★★

    양규는 흥화진에서 군사 700여 명을 이끌고 통주로 가 1,000명을 모은 뒤 밤에 곽주를 습격해 지키던 거란군을 모두 죽이고, 성 안의 남녀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 이듬해 초 물러가는 거란군과도 잇달아 싸워 끌려가던 백성 3만여 명을 되찾았으나, 애전 싸움에서 김숙흥과 함께 전사했다.

    출처: 영어 위키백과 ·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2

  6. 6

    나주 (고려 나주목의 중심, 나주목 관아 일대)

    1011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거란 성종이 대군을 이끌고 와 통주에서 강조의 군대를 무찌르자,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1010년 12월(음력) 개경을 떠나 이듬해 정월 나주에 이르렀다. 거란군은 개경을 불태웠으나 현종이 거란에 직접 가서 예를 올리겠다는 약속(친조)으로 화의가 맺어지고 양규 등의 공격까지 받자 물러났고, 현종은 2월 개경으로 돌아왔다.

    출처: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목록

  7. 7

    서울 진관사 (은평구 진관동)

    1011년 · 난이도 ★★☆

    목종 때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둘 사이에서 난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 왕위 계승자 대량원군에게 자객을 보내자, 신혈사의 승려 진관이 그를 불단 아래 땅굴에 숨겨 살렸다고 전한다. 왕위에 오른 현종은 1011년 이 은혜를 갚고자 신혈사 자리에 큰 절을 세우고 승려의 이름을 따 진관사라 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8. 8

    낙성대 (강감찬 생가 터, 서울 관악구 봉천동)

    948년 · 난이도 ★☆☆

    '별이 떨어진 터'라는 뜻의 낙성대는 948년 강감찬이 태어날 때의 전설에서 이름이 나왔다. 그는 1018년 거란의 3차 침입 때 상원수로 나서 이듬해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으며, 지금은 근처 낙성대 공원에 그를 모신 사당 안국사가 있다.

    출처: 서울시 미디어허브 · 서울시 미디어허브 2

  9. 9

    귀주 (평안북도 구성)

    1019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소배압의 10만 거란군은 개경 공략에 실패하고 퇴각하다 귀주에서 상원수 강감찬의 고려군에게 포위되어 수천 명만 살아 돌아갔다. 이 승리 뒤 고려와 거란은 화약을 맺어 오랜 평화가 이어졌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 영어 위키백과

  10. 10

    도련포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광포 일대로 추정)

    1044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고려는 1033년(덕종 2) 유소의 지휘로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 도련포까지 1,000여 리에 이르는 장성을 쌓기 시작해 1044년(정종 10)에 완성했다. 도련포는 정평 남쪽 바닷가의 석호인 광포 일대로 보지만, 정확한 위치는 확정되지 않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영어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2

  11. 11

    함주 (지금의 함흥)

    1108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윤관은 1107년(예종 2) 별무반을 앞세운 17만 대군으로 여진을 정벌하고 이듬해까지 9성을 쌓았으며, 『세종실록』 지리지 등은 그중 함주를 함흥에 비정한다. 그러나 여진의 거듭된 공격과 반환 요청, 방어의 어려움 때문에 고려는 1109년 9성을 여진에 돌려주었고, 9성 전체의 범위(특히 공험진의 위치)는 지금도 학설이 갈린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 우리역사넷 · 영어 위키백과

  12. 12

    파주 윤관 장군 묘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1111년 · 난이도 ★★★

    9성은 여진의 거듭된 공격과 방어의 어려움 때문에 1109년 여진에게 돌려주었고, 윤관은 한때 관직을 빼앗겼다가 회복된 뒤 1111년 세상을 떠났다. 파평 윤씨 집안이 모셔 온 그의 묘는 조선 후기부터 청송 심씨 집안과 묏자리를 두고 오랫동안 다툰 산송(묘지 소송)으로도 유명하다.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목록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13. 13

    금 상경 회령부 터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아청구)

    1126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 🌏 지도 밖

    여진의 완옌 아구다는 1115년 이곳에서 금을 세웠고, 금은 1125년 거란(요)을 멸망시킨 뒤 고려에 사대를 요구했다. 이자겸이 권력 유지를 위해 이를 받아들이자 반발이 커졌고, 뒷날 묘청 등은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했다.

    출처: 영어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2 · 영어 위키백과 3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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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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