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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벌 귀족과 무신 정권 1089~1270년

문벌 귀족이 흔들린 끝에 무신이 권력을 잡고 백성이 일어선 시대

핵심 정리

이 단원의 장소: 1 춘천 청평사 (고려 때 이름 문수원), 2 남경 (지금의 서울, 청와대 일대), 3 인주 (경원, 지금의 인천 · 인천도호부 관아 터 일대), 4 영광 (옛 영광군 읍내, 지금의 전남 영광군 영광읍), 5 서경 (지금의 평양), 6 정과정 유적 (부산 수영구 망미동, 옛 동래), 7 거제 둔덕기성 (옛 이름 폐왕성, 둔덕면 거림리), 8 명학소 (지금의 대전 서구 탄방동 일대), 9 전주 (옛 도심, 전주 객사 일대), 10 청도 운문사 (경북 청도군 운문면), 11 개경 북산 (송악산, 지금의 개성), 12 진주, 13 담양 (옛 읍내, 객사리 일대)12345678910111213
지도의 번호는 아래 장소 카드의 번호와 같습니다.

문벌 귀족과 이자겸의 난

거란과의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이어진 11세기, 고려에서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몇몇 집안, 곧 문벌 귀족이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이들은 조상이 높은 벼슬을 지냈다는 이유로 과거를 보지 않고 관리가 되는 음서와,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땅으로 힘을 키웠습니다. 딸을 왕비로 들여 왕실과도 혼인으로 얽혔는데, 이자연은 세 딸을 문종의 왕비로 들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손자 이자현은 1089년 벼슬을 버리고 춘천의 산속 절에 들어가 절 이름을 문수원으로 고쳤습니다. 지금의 청평사1입니다. 그는 승려가 되지 않은 채 불교를 닦는 거사로 30여 년을 지내며 연못과 정원을 꾸몄습니다.

1095년에는 이자연의 또 다른 손자 이자의가 왕비였던 누이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다, 그해 왕위에 오른 숙종 세력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왕권을 키우려 애쓴 숙종은 땅의 기운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풍수지리설을 내세운 김위제의 건의를 받아들여, 1104년 지금의 서울인 남경2에 새 궁궐을 완성했습니다. 이 땅은 뒷날 조선의 도읍 한양이 되었습니다.

이자연의 집안은 본관, 곧 집안의 뿌리가 되는 고을의 이름을 따서 인주 이씨라 불렸습니다. 지금의 인천인 인주3는 왕비가 난 곳이라 하여 고을 등급까지 높아졌습니다. 이자현의 사촌 이자겸은 딸을 예종에게 시집보냈고, 그 딸이 낳은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다른 두 딸까지 인종의 왕비로 들였습니다. 왕의 외할아버지이면서 장인이 된 그는 나랏일을 제멋대로 했습니다. 1126년 인종이 그를 몰아내려다 실패하자, 이자겸은 장수 척준경과 함께 궁궐을 불태우고 왕위까지 넘보았습니다. 인종은 척준경을 설득해 이자겸을 붙잡게 했고, 이자겸은 영광4으로 유배되어 그해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서경 천도 운동과 의종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고 왕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고려는 1126년 금을 큰 나라로 섬기기로 한 터였습니다. 이때 서경 출신인 승려 묘청과 문신 정지상 등은 개경의 땅 기운이 다했으니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했습니다. 또 왕을 황제라 부르고 고려만의 연호(해를 세는 이름)를 쓰자는 칭제건원과 금 정벌을 주장했습니다. 인종은 서경에 대화궁까지 지었지만,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의 문벌 귀족이 거세게 반대해 도읍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뜻이 꺾이자 묘청은 1135년 서경5에서 나라 이름을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김부식이 이끈 관군은 이듬해 서경을 함락했고, 개경 문벌 귀족의 힘은 더욱 커졌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역사학자 신채호는 이 사건을 자주적인 세력이 큰 나라를 섬기려는 세력에게 진 일로 보고, 지난 천 년 동안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 했습니다.

인종의 아들 의종은 가까운 문신들과 어울려 잔치와 놀이를 즐겼고, 왕족과 신하가 왕위를 넘볼까 봐 의심했습니다. 1151년 관리 정서는 왕의 아우와 가까이 지냈다는 탄핵을 받아 고향 동래(지금의 부산)로 유배되었습니다. 곧 다시 부르겠다던 왕의 약속을 기다리며 그는 임금을 그리는 노래 「정과정」을 지었고, 그가 머물던 정자 터가 정과정 유적6으로 남아 있습니다. 의종은 끝내 그를 부르지 않았고, 정서는 무신 정변 뒤에야 풀려났습니다.

무신 정변과 일어선 백성

고려에서는 문신이 무신보다 높이 대접받아, 무신은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르기 어려웠고 큰 전쟁의 총사령관도 대개 문신이 맡았습니다. 왕의 잦은 나들이를 호위하던 군인들의 불만도 쌓였습니다. 1170년 의종이 개경 근처 보현원으로 가던 길에, 대장군 이소응이 맨손 무예 겨루기에서 지자 문신 한뢰가 그의 뺨을 때렸습니다. 분노가 터진 정중부·이의방 등이 문신들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이 사건을 무신 정변이라 합니다. 무신들은 의종을 거제로 쫓아내고 그 아우 명종을 세웠습니다. 의종이 3년 동안 머물렀다고 전하는 둔덕기성7은 쫓겨난 왕의 성, 곧 '폐왕성'이라 불려 왔습니다. 1173년 문신 김보당이 의종을 다시 세우려 군사를 일으키자, 의종은 경주로 옮겨졌다가 이의민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뒤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천민(노비처럼 가장 낮은 신분) 출신 이의민이 차례로 권력을 잡으며 서로 다투는 동안, 지방관과 권세가의 수탈은 심해졌습니다. 1176년 지금의 대전에 있던 명학소8의 망이·망소이가 봉기해, 명학소를 거느린 큰 고을 공주까지 점령했습니다. 소는 향·부곡과 함께 일반 고을보다 낮게 대우받던 특수 행정 구역으로, 주민들은 나라에 바칠 쇠붙이나 종이 같은 물건을 만드느라 무거운 부담을 졌습니다. 조정은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올려 달래면서도 군대를 보내 토벌했고, 망이·망소이는 이듬해 다시 일어났지만 끝내 진압되었습니다.

1182년 전주9에서는 지방관이 나라에서 쓸 배를 만들라고 가혹하게 몰아붙이자, 군인 죽동이 관노(관청의 노비) 등과 함께 그를 몰아내고 40여 일 동안 고을을 차지했습니다. 1193년에는 김사미가 청도 운문사10를, 효심이 초전을 근거지로 삼아 봉기해 경상도 일대로 세력을 넓혔습니다. 토벌군에 있던 이의민의 아들이 이들과 몰래 손을 잡아 진압이 늦어지기도 했지만, 이듬해 김사미는 항복했다가 처형되었고 효심도 붙잡혔습니다.

최씨 정권과 만적의 외침

1196년 최충헌은 이의민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왕을 둘이나 내쫓았습니다. 또 개인 군사로 이루어진 경호 부대 도방을 키우고, 교정도감이라는 기구를 두어 나랏일을 직접 처리했습니다.

1198년 최충헌의 노비 만적은 개경 북산에서 땔나무를 하던 노비들을 모았습니다. 북산은 궁궐 뒤로 솟은 송악산11으로 봅니다. 만적은 무신 정변 뒤로 천민 출신이 높은 벼슬에 많이 올랐다며, 『고려사』가 전하는 대로 "장상(장수와 재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라고 외쳤습니다. 이들은 저마다 주인과 최충헌을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태우기로 했지만, 한 노비의 밀고로 들통나 100여 명이 강물에 던져져 죽었습니다.

최충헌은 1206년 진주의 옛 이름 진강을 딴 진강후라는 작위에 올라, 진주12 일대를 식읍으로 받았습니다. 식읍은 세금을 거두어 쓰도록 내려 준 고을입니다. 진주는 최씨 집안의 살림 밑천이 되었고, 최씨 정권은 아들 최우와 손자 최항, 증손 최의까지 4대 60여 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이 무렵에는 경주에서 신라를, 서경에서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봉기도 잇따랐습니다. 몽골과 싸우던 1237년에는 이연년 형제가 담양13에서 백제를 되살리겠다며 일어나 여러 고을을 차지했지만 나주에서 김경손에게 크게 졌습니다. 1258년 최의가 김준 등에게 죽임을 당해 최씨 정권은 끝났고, 1270년 마지막 집권자 임유무가 제거되면서 100년 동안의 무신 정권도 막을 내렸습니다. 백성과 노비의 봉기는 대부분 실패했지만, 단단하던 신분의 벽이 흔들리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연표

  1. 1089년 이자현이 벼슬을 버리고 춘천 문수원(지금의 청평사)에 들어감
  2. 1126년 이자겸의 난, 이자겸이 영광으로 유배됨
  3. 1135년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킴 (이듬해 김부식이 진압)
  4. 1170년 무신 정변, 의종이 거제로 쫓겨남
  5. 1176년 망이·망소이가 공주 명학소에서 봉기
  6. 1196년 최충헌이 이의민을 없애고 권력을 잡음
  7. 1198년 최충헌의 노비 만적이 개경 북산에서 봉기를 꾀함
  8. 1270년 임유무가 제거되며 무신 정권이 끝남

이 단원의 장소

  1. 1

    춘천 청평사 (고려 때 이름 문수원)

    1089년 · 난이도 ★★★

    이자현은 1089년 관직을 버리고 이곳의 보현원을 문수원으로 고쳐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여 년간 선을 닦은 거사(재가 수행자)로, 고려 거사 불교를 대표한다. 그가 꾸민 고려 시대 정원의 자취는 '춘천 청평사 고려선원'이라는 이름으로 명승에 지정되어 있다.

    출처: 영어 위키백과 · 국가유산포털

  2. 2

    남경 (지금의 서울, 청와대 일대)

    1104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고려는 문종 때(1067)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시켰고, 숙종은 김위제가 도선의 비기를 근거로 남경 천도를 주장하자 1101년 남경개창도감을 두어 1104년 궁궐을 완성했다. 조선 초 경복궁을 이 고려 궁궐 옛터의 남쪽에 지었다고 전하므로 궁궐 터는 지금의 청와대 일대로 여겨지며, 이 땅은 조선의 도읍 한양이 되었다.

    출처: 영어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2 · 위키백과 · 위키백과 2

  3. 3

    인주 (경원, 지금의 인천 · 인천도호부 관아 터 일대)

    1126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경원(인주) 이씨 이자연은 세 딸을 문종의 왕비로 들였고, 손자 이자겸도 딸들을 예종과 인종에게 시집보내 외척으로 권력을 쥐었다. 이 고을은 왕비의 고향이라 하여 숙종 때 경원군, 인종 때 인주로 높여졌고, 1390년 일곱 임금의 외가 고을이라 하여 경원부가 되었다가 조선 태종 때인 1413년 지금의 이름인 인천으로 바뀌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인문학 · 영어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2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목록

  4. 4

    영광 (옛 영광군 읍내, 지금의 전남 영광군 영광읍)

    1126년 · 난이도 ★★☆

    인종이 척준경을 설득해 이자겸을 붙잡게 하면서 난은 끝났고, 이자겸은 영광으로 유배되어 그해 말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유배지에서 말린 조기를 임금께 올리며 굽히지 않겠다는 뜻으로 '굴비(屈非)'라 적었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후대에 생긴 설화로 본다.

    출처: 위키백과 · 위키백과 2 · 고려사 열전 반역 이자겸전 (인종 4년, 1126: 영광 유배)

  5. 5

    서경 (지금의 평양)

    1135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개경의 지덕이 다했으니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종은 서경에 대화궁까지 지었으나 김부식 등 개경 문벌 귀족의 반대로 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란은 이듬해(1136) 김부식이 이끈 관군에 진압되었으며, 신채호는 이 사건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평가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 영어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2

  6. 6

    정과정 유적 (부산 수영구 망미동, 옛 동래)

    1151년 · 난이도 ★★★

    정서는 1151년(의종 5) 왕의 아우 대령후 경과 가까이 지냈다는 탄핵을 받아 고향 동래로 유배되었고, 의종이 끝내 부르지 않자 임금을 그리는 노래 「정과정」을 지었다. 그의 호 '과정(瓜亭)'에서 이름을 딴 이 노래는 지은이가 알려진 유일한 고려가요로 꼽혀 『악학궤범』에 실려 전하며, 그는 뒤에 거제로 옮겨졌다가 1170년 명종이 즉위한 뒤에야 풀려났다.

    출처: 위키백과 · 『고려사』 열전 정서 (정항 전에 붙음) · 『악학궤범』 권5 「삼진작」(정과정) ·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래현 고적 과정 (동래부 남쪽 10리)

  7. 7

    거제 둔덕기성 (옛 이름 폐왕성, 둔덕면 거림리)

    1170년 · 난이도 ★★★

    정중부·이의방 등 무신들은 정변 뒤 의종을 거제로, 태자를 진도로 내쫓고 의종의 아우 명종을 세웠다. 1173년 김보당이 의종 복위를 내걸고 봉기하자 의종은 경주로 옮겨졌다가 이의민에게 살해되었으며, 이 성은 2010년 '거제 둔덕기성'이라는 이름으로 사적에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유산포털

  8. 8

    명학소 (지금의 대전 서구 탄방동 일대)

    1176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무신 집권기인 1176년(명종 6) 명학소의 망이·망소이가 봉기해 공주를 점령하자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올려 달랬으나, 이듬해 다시 일어난 봉기는 진압하였다. 공주에 딸린 소였기에 '공주 명학소'로 불린 이곳은 지금의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 일대로 비정되며, 이 봉기는 향·부곡·소 주민에 대한 차별에 맞선 저항으로 평가된다.

    출처: 위키백과

  9. 9

    전주 (옛 도심, 전주 객사 일대)

    1182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전주 사록 진대유가 관선 제작을 가혹하게 독촉하자 주현군의 기두 죽동 등이 관노와 불만 세력을 모아 그를 몰아내고 전주성을 40여 일 동안 장악했다. 무신 집권기 지방관의 수탈에 맞선 하층민 봉기의 하나로, '전주 관노의 난' 또는 '죽동의 난'이라 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유산포털

  10. 10

    청도 운문사 (경북 청도군 운문면)

    1193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1193년 김사미는 운문을, 효심은 초전을 근거로 봉기해 경상도 일대로 세력을 넓혔고, 토벌군에 끼어 있던 집권 무신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이 이들과 내통해 진압이 늦어지기도 했다. 이듬해 김사미는 항복했다가 처형되었고 효심도 끝내 사로잡히면서 봉기는 진압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유산포털

  11. 11

    개경 북산 (송악산, 지금의 개성)

    1198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무신 집권기에 만적 등은 노비들이 각자 주인과 최충헌을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태워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자고 모의했으나, 율학박사 한충유의 노비 순정의 밀고로 발각되어 100여 명이 강물에 던져져 죽었다. 이들이 모인 북산은 고려 궁궐 터(만월대) 뒤로 솟은 개경의 진산 송악산으로 본다.

    출처: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 유네스코 세계유산

  12. 12

    진주

    1206년 · 난이도 ★★★

    최충헌은 진주의 옛 이름인 '진강'을 딴 작위를 받아 1206년(희종 2) 진강후에 오르고 흥녕부를 세웠으며, 진주 일대가 그의 식읍이 되었다. 이후 진주는 4대 60여 년(1196~1258)에 걸친 최씨 정권의 중요한 경제 기반이 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13. 13

    담양 (옛 읍내, 객사리 일대)

    1237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무신 집권기에는 옛 삼국의 부흥을 내건 봉기가 잇따랐는데, 이연년 형제는 원율·담양 일대의 무리를 모아 해양(지금의 광주) 등 여러 고을을 함락했다. 그러나 나주를 공격하다가 전라도지휘사 김경손에게 크게 패해 진압되었고, 백제 부흥을 내세웠다 하여 '백적(百賊)'이라 불렸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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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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