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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불교 사상 978~1385년
의천의 천태종과 지눌·요세의 결사 운동으로 이어진 고려 불교의 흐름
핵심 정리
- 광종은 승과를 두고 탄문 같은 고승을 왕사·국사로 모셔, 불교를 나라의 제도 안에 두었습니다 (968·974)
- 의천은 송에서 돌아와 흥왕사에서 교장을 펴내고, 국청사에서 천태종을 열어 교관겸수를 내세웠습니다 (1097)
- 무신 집권기에 지눌은 수선사 결사로 정혜쌍수·돈오점수를, 요세는 백련결사로 법화 신앙과 참회를 내세웠습니다
- 지눌의 뒤를 이은 혜심은 유교와 불교가 근본에서 다르지 않다는 유불일치설을 폈습니다
- 고려 말 원에서 임제종의 선을 들여온 보우와 지공의 제자 나옹은 불교계를 바로 세우려 했지만, 신진 사대부는 불교의 폐단을 거세게 비판했습니다
나라가 받든 불교
고려는 불교를 나라의 종교처럼 받든 나라였습니다. 태조 왕건은 후손에게 남긴 훈요 10조에서 절을 잘 돌보고 연등회와 팔관회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연등회는 등불을 밝혀 부처에게 복을 비는 행사이고, 팔관회는 토속 신앙과 불교가 어우러진 나라의 큰 행사였습니다. 광종은 관리를 뽑는 과거와 함께 승려를 뽑는 시험인 승과를 두었고, 덕이 높은 승려를 임금의 스승인 왕사와 나라의 스승인 국사로 모셨습니다. 화엄종 승려 탄문은 968년 왕사가, 974년 국사가 되었고, 이듬해 서산의 보원사1로 내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은 터만 남은 이 절에 978년 그의 일생을 새긴 탑비가 세워졌는데, 비문에는 광종 때 불교계의 모습도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고려 전기의 불교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경전을 깊이 공부해 부처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는 교종과, 참선, 곧 조용히 앉아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선종입니다. 교종의 화엄종과 법상종은 왕실과 귀족의 후원으로 번성했고, 선종은 신라 말부터 지방에 자리 잡은 9산 선문으로 이어졌습니다. 두 갈래는 서로 맞서기도 해서, 이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일이 고려 불교의 오랜 숙제가 되었습니다.
의천과 천태종
이 숙제를 풀려고 크게 나선 사람이 문종의 아들 의천입니다. 열한 살에 출가한 의천은 송나라에서 공부하기를 바랐지만 왕과 신하들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1085년 몰래 송나라 상선에 올라 산둥 지방의 항구 판교진2에 내렸습니다. 의천은 송 황제 철종에게 글을 올린 뒤 수도 개봉으로 가서, 송 곳곳의 고승에게 화엄과 천태의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1086년에는 법화경을 으뜸으로 삼는 천태종을 연 지의(지자 대사)의 탑이 있는 천태산3에 올라, 그 가르침을 고려에 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해 돌아온 의천은 아버지 문종이 12년에 걸쳐 2,800칸 규모로 지은 왕실 사찰 흥왕사4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고려는 물론 송·요(거란)·일본에서 경전을 풀이한 책들을 모아 목록을 만들고, 흥왕사에 교장도감이라는 관청을 두어 이 책들을 펴냈습니다. 이렇게 펴낸 풀이책 모음을 교장이라고 합니다. 1097년 개경에 국청사가 완공되자 의천은 그 주지가 되어 천태종을 열었습니다. 그는 경전 공부(교)와 마음을 살피는 수행(관)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교관겸수를 내세워, 교종의 바탕 위에서 선종까지 끌어안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1101년 의천이 세상을 떠나자 불교계는 다시 갈라졌습니다. 죽은 뒤 대각국사라는 이름을 받은 그는 자신이 출가했던 개경(지금의 개성) 오관산 기슭의 영통사5에 묻혔고, 1125년 김부식이 글을 지은 그의 비가 그곳에 세워졌습니다.
무신 집권기의 결사 운동
12세기의 큰 절들은 넓은 땅과 재물을 가졌지만, 그만큼 세속에 물들었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1170년 무신 정변으로 문벌 귀족이 무너지자 귀족과 가까웠던 교종은 힘을 잃었고, 선종이 새롭게 일어섰습니다. 이 무렵 사람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곳이 예천 용문사6입니다. 이 절의 대장전은 1173년 처음 지었다고 전하는데, 그 안에는 경전을 넣은 팔각 책장인 윤장대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돌리기만 해도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을 쌓는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비판 속에서 승려들 스스로 마음을 다잡자는 결사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결사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어 함께 수행하는 것입니다. 선종 승려 지눌은 승려들이 명예와 이익만 좇는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는 1188년 팔공산 거조사7에 뜻을 같이할 승려들을 모았고 1190년 「권수정혜결사문」을 지어 결사를 정식으로 열었습니다. 결사는 1200년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 갔고, 뒤에 즉위한 희종이 산과 절의 이름을 조계산 수선사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지금의 순천 송광사8입니다. 지눌은 마음을 고요히 모으는 선정과 사물을 바로 보는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 먼저 단번에 깨달은 뒤 꾸준히 닦아 나가는 돈오점수를 가르쳤습니다. 의천과 달리 지눌은 선종을 중심에 두고 교종까지 아울렀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 한국 불교의 큰 줄기로 이어졌습니다.
천태종 승려 요세는 한때 지눌과 함께 수행했지만, 뒤에 따로 결사를 꾸렸습니다. 그는 1211년부터 강진 만덕산의 옛 절터에 절을 다시 짓고, 1232년 그 절에서 보현도량이라는 수행 모임을 열어 백련결사를 이끌었습니다. 고려 때 만덕사라 불린 이 절이 지금의 백련사9입니다. 요세는 법화경을 믿고 따르는 신앙과, 스스로 지은 잘못을 깊이 뉘우치는 참회를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지방 사람들과 일반 백성에게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지눌의 뒤를 이어 수선사를 이끈 혜심은 젊어서 유학을 공부해 과거 본시험에 앞서 치르는 사마시에 합격한 적이 있는 승려였습니다. 그는 유교와 불교가 근본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유불일치설을 폈는데, 이 생각은 뒷날 고려가 송나라에서 새로 발전한 유학인 성리학을 받아들이는 바탕이 되었다고 평가됩니다. 혜심이 세웠다고 전하는 강진 월남사 터10에는 이름난 문장가 이규보가 글을 지은 그의 비가 아랫부분만 남아 있습니다.
원 간섭기와 고려 말의 불교
원의 간섭을 받던 13세기 말부터 결사 운동의 정신은 차츰 흐려졌습니다. 큰 절들은 왕실이나 권문세족, 곧 원과 가까이 지내며 권세를 누린 집안들과 손잡고 땅과 노비를 늘렸습니다. 이런 가운데 원을 오간 승려들이 새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1326년에는 원을 거쳐 온 인도 승려 지공이 고려에서 설법했습니다. 이색이 지은 비문에 따르면 지공은 마가다국 왕자로 태어나 여덟 살에 옛 불교 대학인 나란다 사원11에서 출가했습니다.
보우는 1346년 원에 건너가, 이듬해 하무산12 천호암에서 중국 선종의 한 갈래인 임제종의 고승 석옥 청공에게 깨달음을 인정받았습니다. 1348년 돌아온 그는 뒤에 공민왕의 왕사가 되어 원융부라는 관청을 두고, 흩어져 있던 9산 선문을 하나로 묶으려 했습니다. 원에서 지공의 제자가 된 나옹 혜근도 돌아와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고, 양주 회암사를 크게 고쳐 지었습니다. 1376년 나옹은 조정의 명으로 밀양으로 가던 길에 남한강 가의 여주 신륵사13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1382년 세상을 떠난 보우의 사리탑과 1385년 이색이 글을 지은 탑비는, 그가 일찍이 암자를 짓고 머물렀던 북한산의 태고사14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도 불교계에 쌓인 폐단을 다 씻어 내지는 못했습니다.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 사대부, 곧 성리학을 공부하고 새로 벼슬길에 나선 사람들은 불교가 나라 살림을 축내고 사람의 도리를 어지럽힌다며 거세게 비판했습니다. 이들이 세운 조선은 성리학을 나라의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다만 나옹의 제자 무학이 조선을 세운 이성계를 도운 것처럼, 고려 불교의 흐름은 새 왕조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연표
- 968년 광종이 화엄종 승려 탄문을 왕사로 삼음 (974년 국사)
- 1085년 의천이 몰래 송나라 상선을 타고 판교진에 내림
- 1097년 개경 국청사 완공, 의천이 천태종을 엶
- 1190년 지눌이 거조사에서 「권수정혜결사문」을 반포함 (1200년 송광산 길상사로 옮겼고, 뒤에 희종이 수선사라는 이름을 내림)
- 1232년 요세가 강진 만덕산 만덕사(지금의 백련사)에서 보현도량을 열고 백련결사를 이끎
- 1326년 인도 승려 지공이 고려에 와서 설법함
- 1347년 보우가 원의 하무산에서 임제종 고승 석옥 청공에게 깨달음을 인정받음
- 1376년 나옹 혜근이 밀양으로 가던 길에 여주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남
이 단원의 장소
- 1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탑비,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탄문(900~975)은 974년 국사가 되고 이듬해 이 절로 내려와 입적했으며, 김정언이 짓고 한윤이 쓴 탑비 비문은 그의 생애와 광종 때의 불교계를 자세히 전한다. 터에는 승탑과 탑비 말고도 2025년 국보가 된 오층석탑, 당간지주, 큰 돌 물통인 석조 등이 남아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 뉴시스
- 2
밀주 판교진 (오늘날 중국 산둥성 칭다오시 자오저우)
의천은 1085년 5월 이곳에 닿아 밀주 지주 범악을 통해 송 황제 철종에게 글을 올린 뒤 수도 개봉으로 가서, 1086년 귀국할 때까지 송 곳곳에서 화엄·천태 등을 배웠다. 판교진은 당나라 때부터 신라 사람들이, 뒤에는 고려 사람들이 드나든 산둥의 큰 항구였으며, 2009년 오늘날 자오저우 옛 시가지 아래에서 송나라 건물 터와 수십만 점의 도자기 조각이 발굴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인문학 · 영어 위키백과 · 참고 자료 · 참고 자료 2 · 영어 위키백과 2
- 3
톈타이산(천태산) 국청사 일대 (중국 저장성 톈타이현)
귀국한 의천은 1097년 개경에 국청사가 완공되자 주지가 되어 천태종을 열고, 교학과 참선을 함께 닦는 교관겸수를 내세워 교종과 선종을 아우르려 했다. 개경 국청사라는 이름도 천태종의 근본 도량인 이 산의 국청사에서 따온 것이다.
- 4
흥왕사 터 (개성 남동쪽 교외)
흥왕사는 1056년에 짓기 시작해 1067년에 완공한 왕실 사찰로, 의천은 1086년 귀국한 뒤 이곳에 머물며 고려·송·요·일본에서 모은 불교 경전 주석서를 정리해 교장으로 간행했다. 1363년에는 김용 일당이 이곳 행궁에 머물던 공민왕을 시해하려 한 흥왕사의 변이 일어났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서긍, 『고려도경』 권17 사우(祠宇) 흥왕사 조
- 5
영통사 (개성 오관산 기슭)
의천은 1065년 이 절에서 출가했고 1101년 세상을 떠난 뒤 이곳에 묻혔으며, 김부식이 비문을 지은 영통사 대각국사비가 지금도 서 있다. 오랫동안 터만 남았던 절은 북한 조선불교도연맹과 남한 대한불교천태종이 함께 복원해 2005년 10월 낙성되었다.
- 6
예천 용문사 (용문면 내지리)
신라 때인 870년 두운이 세웠다고 전하는 절로, 1173년 대장전과 윤장대를 처음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하며 지금의 대장전은 조선 후기에 고쳐 지은 것이다. 옛 윤장대가 남은 드문 예로, 대장전과 윤장대는 2019년 함께 국보로 지정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목록
- 7
영천 거조사 영산전 (경북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팔공산)
지눌은 1188년 동료 승려 득재의 초청으로 공산(지금의 팔공산) 거조사로 와서 뜻을 함께할 승려들을 모았고, 1190년 이곳에서 「권수정혜결사문」을 반포해 선정(정)과 지혜(혜)를 함께 닦자는 결사를 정식으로 열었다. 결사는 1200년 송광산 길상사로 옮겼고 뒤에 희종이 수선사라는 이름을 내렸으며, 거조사에는 고려 말에 지은 주심포 양식의 영산전이 남아 있다.
- 8
순천 송광사 (당시 이름은 길상사, 곧 수선사로 개칭)
지눌은 1190년 팔공산 거조사에서 「권수정혜결사문」을 반포해 정혜결사를 시작했고, 1200년 송광산 길상사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 뒤 1204년에 즉위한 희종이 산과 절의 이름을 조계산 수선사로 바꾸어 주었다. 지눌을 시작으로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이 절이 오늘날의 송광사로, 통도사(불보)·해인사(법보)와 함께 삼보사찰 가운데 승보사찰로 불린다.
- 9
강진 백련사 (고려 때 이름 만덕사)
요세는 1211년 만덕산의 옛 절터에 절을 다시 짓기 시작해 1232년 보현도량을 열었고, 천태종의 법화 신앙과 참회를 앞세운 백련결사는 지방 사람들과 일반 백성의 호응을 얻었다. 지눌의 수선사 결사와 함께 무신 집권기 불교 결사 운동을 대표한다.
출처: 국가유산포털
- 10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혜심(1178~1234)은 수선사의 두 번째 사주로 선종의 화두를 모은 『선문염송』을 엮었으며, 월남사는 그가 세웠다고 전한다. 비는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 아랫부분만 남았고, 뒷면의 글(음기)은 1250년(고종 37) 최자가 지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인문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11
나란다 사원 유적 (나란다 마하비하라, 인도 비하르주)
이색이 지은 비문에는 지공이 마가다국 왕의 셋째 아들로 여덟 살에 나란다 사원에서 출가했다고 적혀 있는데, 나란다는 5세기 무렵 세워져 현장 등 여러 나라 승려가 공부한 불교 대학으로 그 유적은 201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다. 지공의 사리를 모신 부도는 제자 나옹이 중창한 양주 회암사 터 뒷산에 나옹·무학의 부도와 함께 서 있다.
- 12
하무산(霞霧山) 천호암 터 일대 (오늘날 하막산(霞幕山), 중국 저장성 후저우시 우싱구)
보우는 1347년 호주(지금의 후저우) 하무산 천호암에서 석옥 청공에게 인가를 받고 1348년 귀국해 고려에 임제종의 법맥을 전했다. 뒤에 공민왕의 왕사가 되어 원융부를 두고 9산 선문을 하나로 묶으려 했다.
- 13
여주 신륵사
나옹은 회암사를 크게 고쳐 지은 뒤 1376년 조정의 명으로 밀양으로 가던 길에 신륵사에서 입적했고, 1379년 제자들이 사리를 모신 석종과 이색이 글을 지은 석종비를 세웠다. 남한강 가의 이 절은 그 뒤 크게 일어섰으며, 조사당에는 지금도 스승 지공, 제자 무학과 함께 나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출처: 영어 위키백과 · 국가유산포털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인문학
- 14
고양 태고사 (북한산성 안)
보우는 1341년 삼각산(북한산) 중흥사 동쪽 봉우리에 암자(태고암)를 짓고 머물렀고, 원에서 임제종의 법맥을 이어 온 뒤 공민왕의 왕사가 되어 원융부를 두고 9산 선문의 통합을 시도했다. 1382년 그가 입적한 뒤 이곳에 사리탑이 세워지고, 3년 뒤인 1385년 이색이 비문을 지은 탑비가 섰다.
출처: 국가유산포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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