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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역사서와 금속 활자 983~1377년
대장경과 『삼국유사』·『제왕운기』, 『직지』로 남은 고려의 책
핵심 정리
- 거란의 침입 속에 새긴 초조대장경은 경판이 1232년 부인사에서 몽골군에게 불타고, 찍어 둔 책만 일본 난젠지 등에 남았습니다
-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조정은 대장도감과 남해 등의 분사대장도감을 두고 팔만대장경을 새겼고(1236~1251), 그 경판은 지금 해인사에 있습니다
-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는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 역사책입니다
- 몽골의 침입과 원의 간섭 속에 나온 이승휴의 『제왕운기』(1287)와 일연의 『삼국유사』는 단군을 우리 역사의 시작으로 적었습니다
-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찍은 『직지』는 지금 남아 있는 금속 활자본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하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습니다
송에서 온 대장경과 초조대장경
대장경은 부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과 그 풀이, 스님들이 지킬 규칙을 모두 모은 불교 경전 모음입니다. 중국 송나라는 태조의 명으로 971년부터 나무판에 글자를 새기기 시작해 983년 13만여 장의 판목을 완성했습니다. 판목을 새긴 곳은 당나라 때부터 목판 인쇄로 이름난 익주1, 지금의 중국 청두였고, 다 새긴 판목은 수도 개봉으로 옮겨 찍어 냈습니다. 경전 전체를 처음으로 인쇄한 이 대장경을 개보대장경이라 부릅니다. 991년 송에 사신으로 갔던 한언공이 그 인쇄본을 고려로 들여왔습니다.
1010년 거란이 다시 쳐들어오자 현종은 남쪽으로 피란했고, 이듬해 개경은 거란군에게 짓밟혔습니다. 고려 조정은 부처의 힘으로 적을 물리치기를 빌며 1011년 무렵 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개보대장경을 바탕으로 삼은 이 대장경은 1087년 무렵 완성되었는데, 처음 새긴 대장경이라 하여 초조대장경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초조대장경의 경판, 곧 경전을 새긴 나무판은 지금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경판으로 찍어 낸 책만 전하는데, 가장 많이 남은 곳은 일본 교토의 난젠지2입니다. 이곳의 1,715권은 일본 쓰시마섬(대마도)과 우리나라에 남은 것을 합친 것보다 많고, 그 가운데 한 권에는 고려 사람이 한문을 우리말로 풀어 읽으려고 뾰족한 도구로 눌러 새긴 점 표시도 남아 있습니다. 경판이 사라진 것은 몽골의 침입 때문이었습니다. 1232년 몽골의 2차 침입 때, 경판을 보관하던 대구 팔공산의 부인사3에서 몽골군이 경판을 모두 불태워 버린 것입니다.
강화도에서 다시 새긴 팔만대장경
몽골을 피해 1232년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고려 조정은 1236년 대장도감이라는 관청을 두고 대장경을 처음부터 다시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대장경은 두 번째로 새겼다고 해서 재조대장경이라 하고, 경판이 8만여 장이라서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듬해인 1237년 임금과 신하들이 대장경을 새기는 뜻을 부처에게 아뢴 글은 이름난 문장가 이규보가 지었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몽골군이 부인사의 경판까지 태워 버렸다고 슬퍼하고, 현종 때 대장경을 새기겠다고 맹세하자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던 일을 들며 이번에도 몽골군이 물러가기를 빌었습니다. 이 글은 이규보의 글 모음집인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전합니다.
경판을 새기는 일은 지방에서도 나누어 맡았습니다. 대장도감에서 갈라져 나온 이런 작업장들을 분사대장도감이라 불렀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남해4입니다. 남해에서는 1243년부터 경판을 새겼고,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우의 처남 정안이 자기 재산을 내어 도왔다고 전합니다. 승려 수기는 초조대장경과 송·거란의 대장경을 서로 견주어 틀린 글자를 바로잡았고, 덕분에 팔만대장경은 매우 정확한 대장경으로 이름났습니다.
경판은 1251년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1245년 최우가 강화도에 세운 선원사5는 이 경판을 보관한 절로 전해집니다. 조선의 『태조실록』에는 1398년(태조 7) 대장경판을 강화 선원사에서 한양으로 실어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경판은 지천사를 거쳐 곧 합천 해인사로 옮겨져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으며,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은 역사책
고려 사람들은 역사책도 남겼습니다. 1145년 김부식은 인종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엮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우리 역사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유교의 관점에서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무신 정권 때인 1193년 이규보는 고구려를 세운 동명왕의 이야기를 긴 이야기 시, 곧 서사시인 『동명왕편』으로 노래하며 고려가 고구려를 이은 나라라는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1241년 세상을 떠나 강화도에 묻혔고, 지금 강화 길상면에 이규보 묘6가 남아 있습니다.
몽골과의 긴 전쟁을 겪고 원의 간섭을 받게 되자, 우리 역사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밝히려는 책들이 나왔습니다. 관리 이승휴는 1280년 충렬왕의 잘못을 따지는 글을 올렸다가 벼슬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는 삼척 두타산 기슭에 용안당7을 짓고 지내며 1287년 『제왕운기』를 지었습니다. 상권에는 중국의 역사를, 하권에는 단군에서 고려까지 우리 역사를 시로 읊어, 우리 역사가 중국과 나란히 따로 이어져 왔음을 보여 주었고 발해도 우리 역사에 넣었습니다. 용안당은 뒷날 절이 되어 지금은 천은사라 불립니다.
승려 일연은 1283년 국존, 곧 나라의 스승으로 받드는 가장 높은 승려가 된 뒤, 이듬해 지금의 대구 군위에 있는 인각사8로 내려가 128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렀습니다. 그가 이 무렵 마무리한 것으로 보는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이야기가 실려 있고, 『삼국사기』에 빠진 옛이야기와 불교 이야기, 신라의 노래인 향가도 담겨 있습니다. 두 책이 모두 단군을 우리 역사의 시작으로 적은 것은 외적의 침입과 간섭 속에서 같은 뿌리를 가진 겨레라는 생각이 커졌음을 보여 줍니다.
금속 활자로 찍은 『직지』
목판 인쇄는 책마다 판을 새로 새겨야 했습니다. 금속 활자는 쇠붙이를 녹여 틀에 부어 글자 하나하나를 따로 만든 것입니다. 글자를 판에 짜 맞추어 찍은 뒤 다시 풀어 다른 책의 판을 짤 수 있어서, 여러 가지 책을 조금씩 찍기에 알맞았습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강화도 시절인 1234년 무렵 나라의 예법을 정리한 『상정고금예문』을 금속 활자로 찍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책은 전하지 않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금속 활자 책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직지』입니다. 본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로, 백운 화상이라 높여 불린 스님 경한이 부처와 이름난 스님들의 말씀 가운데 마음을 깨닫는 데 요긴한 대목을 골라 엮은 책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이 1377년(우왕 3) 청주의 흥덕사9에서 이 책을 금속 활자로 찍어 냈는데, 유럽에서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자로 성경을 찍은 것보다 70여 년 앞섭니다. 책 끝에는 청주 고을 밖의 흥덕사에서 쇠 활자로 찍었다고 적혀 있지만, 그 절이 어디 있었는지는 오랫동안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1985년 발굴에서 '흥덕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쇠북 조각이 나와 절터가 확인되었습니다.
금속 활자로 찍은 『직지』는 상·하 두 권 가운데 하권 한 권만 남아 있습니다. 19세기 말 서울에 머물던 프랑스 외교관 콜랭 드 플랑시가 이 책을 구해 프랑스로 가져갔고, 1911년 경매에서 수집가 앙리 베베르가 사들였습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책은 1952년 파리의 프랑스 국립도서관10에 들어갔습니다. 1972년 이 도서관에서 일하던 박병선이 '세계 도서의 해' 전시에 이 책을 내놓으면서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졌고,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었습니다.
연표
- 983년 송이 익주에서 개보대장경 판목을 다 새김 (991년 한언공이 고려로 들여옴)
- 1011년 거란의 침입 속에 초조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함 (1087년 무렵 완성)
- 1145년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엮음
- 1232년 몽골의 2차 침입 때 부인사에 있던 초조대장경 경판이 불탐
- 1236년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두고 재조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함 (1251년 완성)
- 1287년 이승휴가 삼척 두타산에서 『제왕운기』를 지음
- 1289년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이 군위 인각사에서 세상을 떠남
-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직지』를 금속 활자로 찍어 냄
이 단원의 장소
- 1
익주 (오늘날 중국 쓰촨성 청두)
개보대장경은 당나라 때부터 목판 인쇄가 발달한 익주(오늘날 청두)에서 새긴 뒤 판목을 수도 개봉으로 옮겨 찍어 냈다. 991년(성종 10) 한언공이 들여온 이 대장경은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새기기 시작한 초조대장경의 주된 저본이 되었다.
출처: 영어 위키백과 · 중국어 위키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2
난젠지(남선사) (일본 교토)
교토의 선종 대사찰 난젠지에는 고려 초조대장경 인경본 1,715권이 전해 오는데, 쓰시마(600여 권)와 국내(300여 권)에 남은 것보다 훨씬 많아 판목이 사라진 초조대장경을 복원하는 핵심 자료가 된다. 이 가운데 『유가사지론』 권8에는 고려 사람이 한문을 우리말로 풀어 읽으려고 각필로 새긴 점토 구결이 남아 있다.
출처: 참고 자료 · 참고 자료 2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영어 위키백과
- 3
부인사 (대구 팔공산)
초조대장경은 현종 때인 1011년 무렵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새기기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으로, 팔공산 부인사로 옮겨 보관되다가 1232년(고종 19) 몽골군에게 불타 사라졌다. 고려는 대장도감을 두어 1236년부터 1251년까지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을 새로 새겼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 4
남해 고현면 일대 (분사남해대장도감 추정지, 오곡리·대사리)
고려는 1236년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두고 재조대장경을 새겼고, 남해의 분사대장도감은 판각을 나누어 맡은 분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곳으로 경판 간기에 '분사남해대장도감'이라 새겨져 있다. 정확한 터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지표·시굴 조사에서 고현면 오곡리 관당마을과 대사리 일대가 유력한 곳으로 꼽혔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 서울신문 · 참고 자료 · 서울신문 2 · 참고 자료 2
- 5
강화 선원사지 (인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강화로 도읍을 옮긴 고려는 1236년 대장도감을 두고 1251년까지 경판을 새겼으며, 1245년 최우가 세운 선원사는 이 경판을 보관한 절로 전해진다. 『태조실록』에는 1398년 경판을 강화 선원사에서 실어 와 한양의 지천사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고, 경판은 곧 해인사로 옮겨져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 6
이규보 묘 (인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이규보는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옮겨 간 조정에서 대장경을 새길 때 임금과 신하들이 부처에게 올린 「대장각판군신기고문」(1237) 등 나라의 중요한 글을 지었고, 1241년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다. 같은 해 아들 이함이 그의 글을 모아 『동국이상국집』을 엮었다.
- 7
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적 (미로면 천은사)
1280년(충렬왕 6) 왕의 실정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파직된 이승휴는 두타산 기슭에 용안당을 짓고 은거하며 『제왕운기』를 지었는데, 상권에 중국사를, 하권에 단군부터 고려까지의 우리 역사를 담아 우리 역사를 중국과 대등한 독자적 역사로 서술하고 발해도 우리 역사에 넣었다. 용안당은 1294년 절(간장사)이 되었고, 1899년부터 천은사라 불린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인문학 · 영어 위키백과
- 8
군위 인각사 (대구 군위군 삼국유사면 화북리)
일연은 1283년(충렬왕 9) 국존에 책봉된 이듬해 인각사로 내려와 1289년 입적할 때까지 머물렀으며, 단군의 고조선 건국 이야기를 실은 『삼국유사』를 이 시기에 이곳에서 마무리한 것으로 본다. 절에는 그의 승탑과 비(보각국사탑 및 비, 보물)가 남아 있고, 절이 있는 면의 이름도 2021년 '삼국유사면'으로 바뀌었다.
- 9
청주 흥덕사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은 1377년(우왕 3)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되었고, 하권 1책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전한다. 1985년 발굴에서 '흥덕사' 명문 금구가 나와 절터가 확인되었으며, 직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유산포털 · 위키백과
- 10
프랑스 국립도서관 리슐리외관 (프랑스 파리)
직지는 19세기 말 서울에 주재한 프랑스 외교관 콜랭 드 플랑시가 수집해 프랑스로 가져갔고, 1911년 경매에서 수집가 앙리 베베르가 사들인 뒤 그의 유증으로 195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들어와 리슐리외관의 필사본부에 보관되어 있다. 1972년 이 도서관에서 일하던 박병선이 '세계 도서의 해' 전시에 내놓으면서 현존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널리 알려졌고,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참고한 자료
- 『고려사』 세가 현종·고종
-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대장각판군신기고문」·「신인상정예문발미」
-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1398) 5월 기사
- 일연, 『삼국유사』 · 이승휴, 『제왕운기』
-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 끝의 간행 기록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초조대장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팔만대장경', '대장도감', '분사대장도감', '제왕운기', '삼국유사',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 국가유산포털 '청주 흥덕사지'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인문학 위키 '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적'
- 프랑스 국립도서관 '직지, 인쇄의 보물'
-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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