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퀴즈 › 시대 안내 › 고려 › 홍건적·왜구와 고려의 멸망
홍건적·왜구와 고려의 멸망 1350~1392년
홍건적·왜구와 싸우다 위화도 회군을 거쳐 막을 내린 고려
핵심 정리
- 1350년 무렵부터 왜구가 크게 늘었고, 홍건적도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 쳐들어와 고려는 두 번째 침입 때 개경까지 빼앗겼습니다
- 최영은 홍산에서(1376), 이성계는 황산에서(1380) 왜구를 크게 무찔렀습니다
- 최무선이 만든 화포로 진포(1380)와 관음포(1383)에서 왜선을 불태웠고, 1389년 박위가 왜구의 근거지 쓰시마를 쳤습니다
- 명이 철령 북쪽 땅을 요구하자 고려는 요동 정벌에 나섰지만,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권력을 잡았습니다 (1388)
- 과전법 실시(1391)와 정몽주의 죽음을 거쳐 1392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며 고려는 막을 내렸습니다
북쪽의 홍건적, 남쪽의 왜구
14세기 중엽 고려는 북쪽과 남쪽 두 방향의 적과 싸워야 했습니다. 남쪽 바다에서는 1350년 무렵부터 일본의 해적 무리인 왜구가 부쩍 늘었습니다. 그 무렵 일본은 조정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싸우던 때라 바닷가 무리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왜구의 근거지로는 쓰시마(대마도)와 이키섬1, 규슈 북쪽의 마쓰우라 지방이 흔히 꼽혀, 세 곳을 묶어 '삼도'라고도 부릅니다.
북쪽에서는 홍건적이 내려왔습니다. 홍건적은 원나라 말 중국에서 일어난 반란 무리로,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러 이런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 한 갈래는 1358년 원의 여름 수도였던 상도2까지 쳐들어가 궁궐을 불태운 뒤 요동으로 옮겨 왔습니다. 원의 군대에 쫓기던 이들은 1359년 겨울 압록강을 건너와 서경(평양)을 차지했지만, 고려군은 이듬해 이들을 몰아냈습니다.
1361년 겨울에는 홍건적 10만여 명이 다시 쳐들어왔습니다. 고려군이 이를 막지 못하자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멀리 경상도의 복주3, 곧 지금의 안동까지 피란했고, 개경은 홍건적에게 함락되었습니다. 안성4 사람들은 더 남쪽으로 내려오던 홍건적에게 항복하는 척하다가 우두머리들을 베어 길을 막았고, 그 공으로 안성은 현에서 군으로 높아졌습니다. 공민왕은 복주에서 반격을 준비했고, 1362년 정월 정세운·안우·이방실 등이 이끈 고려군이 개경을 되찾았습니다.
끝없이 몰려온 왜구
왜구의 침입은 홍건적보다 훨씬 길게 이어졌습니다. 왜구는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개경으로 실어 나르던 배와 바닷가 창고를 노렸고, 이 뱃길이 막히자 나라 살림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고려는 외교로도 길을 찾았습니다. 1366년 공민왕은 왜구 단속을 부탁하는 국서, 곧 나라의 편지를 김용·김일 등에게 들려 일본에 보냈습니다. 일본 쪽 기록에 따르면 이듬해 교토에 닿은 사신 일행은 큰 절인 덴류지5에 머물며 답을 기다렸습니다. 일본 조정은 답서를 보내지 않았고, 무사 정권인 막부가 승려 사신을 보내 답례했을 뿐입니다. 1377년에는 정몽주도 규슈로 건너가 단속을 부탁했지만, 내란에 빠진 일본은 왜구를 다 막지 못했습니다.
왜구는 갈수록 대담해졌습니다. 1374년에는 왜선 350척이 경상도의 군항 합포(지금의 창원 마산)를 덮쳐 군영과 병선(싸움배)을 불태웠고, 군사 5,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376년에는 금강을 거슬러 올라와 공주를 함락하고 연산의 개태사까지 휩쓸었습니다. 그러자 예순 무렵의 노장 최영이 스스로 나섰습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그는 홍산6에서 앞장서 돌격하다 숨어 있던 적의 화살에 입술을 맞았지만, 태연히 그 적을 쏘아 쓰러뜨리고 끝까지 싸워 크게 이겼습니다(홍산 대첩). 대첩은 크게 이긴 싸움을 말합니다. 1378년 고려는 큰 피해를 입었던 합포7에 성을 쌓아 방비를 굳혔습니다.
화포와 장수들의 활약
왜구를 바다에서 꺾으려면 새 무기가 필요했습니다. 최무선은 오랜 노력 끝에 화약의 원료인 염초 만드는 법을 알아냈고, 1377년 조정에 건의해 화약 무기를 만드는 관청인 화통도감을 세웠습니다. 1380년 왜구가 배 500여 척을 금강 어귀의 진포8에 서로 묶어 두고 뭍에 올라 노략질하자, 나세·심덕부·최무선이 전함 100여 척을 이끌고 나가 화포를 쏘았습니다. 묶여 있던 왜선은 거의 모두 불탔습니다(진포 대첩).
돌아갈 배를 잃은 왜구는 내륙을 휩쓸다가 지금의 함양 땅에 있던 역참인 사근내역9에 진을 쳤습니다. 배극렴 등 아홉 원수(군대를 이끄는 장수)가 이들을 쳤다가 크게 져서, 박수경·배언 두 원수와 군사 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기세가 오른 왜구는 남원 운봉 쪽으로 넘어갔고,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이 운봉의 황산10에서 이들을 맞았습니다. 이성계가 화살로 적장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뜨리자 이지란이 곧바로 활을 쏘아 그를 쓰러뜨렸고, 대장을 잃은 왜구는 크게 무너졌습니다. 이 황산 대첩으로 이성계는 이름을 크게 떨쳤습니다.
1383년에는 왜선 120척이 경상도 바다로 몰려왔습니다. 바다의 군사를 맡은 해도원수 정지는 배 47척으로 맞서, 남해도의 관음포11 앞바다에서 화포를 쏘아 적의 배를 불살랐습니다(관음포 대첩). 이 바다는 1598년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합니다.
위화도 회군과 고려의 끝
원을 북쪽으로 몰아낸 명나라는 1388년 철령12 고개 북쪽이 본래 원의 땅이었다며, 그곳에 철령위라는 군사 기지를 두겠다고 알려 왔습니다. 그 땅은 원이 쌍성총관부라는 관청을 두어 다스리다가 1356년 공민왕이 되찾은 곳이었습니다.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로 맞서기로 했습니다.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고, 여름은 농사철이며, 왜구가 빈틈을 노릴 수 있고, 장마로 활이 눅어 망가지고 병이 돌 수 있다는 네 가지 까닭(4불가론)을 들어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조민수와 이성계는 정벌군을 이끌고 떠났고, 압록강 하류의 섬 위화도13에 이르러 장맛비로 강물이 불어나자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향했습니다(위화도 회군).
개경을 차지한 회군 세력은 우왕을 몰아내고 그 아들 창왕을 세웠으며, 최영을 귀양 보냈다가 그해 말 처형했습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평생 지킨 최영은 자신에게 욕심이 있었다면 무덤에 풀이 날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고양에 있는 최영 장군 묘14에는 정말 오랫동안 풀이 자라지 않아 '붉은 무덤'이라 불렸다고 전합니다.
한편 1387년 정지는 왜구가 일본 온 나라의 짓이 아니라 쓰시마·이키 같은 섬에 모인 무리의 짓이니 그 근거지를 치자고 건의했습니다. 1389년 박위는 전함 100척을 이끌고 쓰시마15로 건너가 왜선 300척을 불태우고, 붙잡혀 갔던 고려 사람 100여 명을 데려왔습니다. 같은 해 오키나와섬의 류큐 중산국 왕 찰도가 왜구에게 끌려간 고려 사람들을 돌려보내며 처음 고려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찰도가 머문 왕성은 오키나와의 우라소에 성16이었다고 봅니다.
이성계 세력은 1389년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닌 신돈의 자손이라며 창왕마저 몰아내고 공양왕을 세웠습니다. 1391년에는 과전법을 실시해 권세가의 넓은 농장을 무너뜨리고, 관리들에게 땅에서 세금을 거둘 권리를 새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리학을 익힌 새 관리들인 신진 사대부는 이 무렵 둘로 갈라졌습니다. 정도전 등은 새 왕조를 세우려 했고, 정몽주 등은 고려를 지키면서 고쳐 나가자고 했습니다. 1392년 정몽주가 개경 선죽교에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 세력에게 죽임을 당하자 고려를 지키려던 마지막 힘이 무너졌고, 그해 7월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는 474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용인에는 1406년 개성 근처에서 옮겨 온 정몽주의 묘17가 있습니다. 쫓겨난 공양왕은 1394년 삼척에서 죽임을 당했고, 고양에는 왕비와 나란히 묻힌 공양왕릉18이 있습니다.
연표
- 1350년 이 무렵부터 왜구의 침입이 크게 늘어남
- 1361년 홍건적 2차 침입, 공민왕이 복주(안동)로 피란하고 개경 함락 (이듬해 정월 개경 수복)
- 1376년 최영의 홍산 대첩
- 1380년 최무선의 화포를 앞세운 진포 대첩, 이성계의 황산 대첩
- 1388년 명의 철령위 통보와 요동 정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 1389년 박위의 쓰시마 정벌, 류큐 중산국이 처음 사신을 보냄
- 1391년 과전법 실시
- 1392년 정몽주가 죽임을 당하고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고려가 막을 내림
이 단원의 장소
- 1
이키섬 (일기도, 일본 나가사키현)
고려 장수 정지는 '왜는 온 나라가 도적이 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반민들이 쓰시마·이키 등 여러 섬에 웅거해 노략질하는 것'이라며 그 소굴을 치자고 건의했고, 1389년 박위의 쓰시마 공격과 조선 초의 정벌로 이어졌다. 이키섬은 1274년과 1281년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 때에도 싸움터가 되었다.
- 2
상도 유적 (원의 여름 수도, 중국 내몽골 정란치)
상도는 쿠빌라이가 1256년 개평부로 쌓고 1260년 칸에 오른 곳으로, 대도(지금의 베이징)와 함께 원의 두 수도였다. 1358년 이곳을 불태운 관선생·파두반(반성)의 홍건적은 요동으로 옮겨 간 뒤 고려에 쳐들어와, 1361년에는 개경까지 함락했다.
- 3
안동 (당시 복주)
공민왕은 복주에 머물며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아 반격을 준비했고, 1362년 정월 정세운·안우·이방실 등이 이끈 고려군이 홍건적에게 함락된 개경을 되찾았다. 이 일로 복주는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공민왕이 쓴 '영호루' 현판과 노국대장공주와 얽힌 놋다리밟기 전설이 지금도 전한다.
출처: 영어 위키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 위키백과 2
- 4
안성 (옛 안성현, 지금의 안성 시내)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복주(안동)로 피난한 사이, 안성 사람들은 거짓 항복으로 적을 속인 뒤 우두머리들을 죽여 홍건적이 더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막았다. 이 공으로 안성현은 군으로 승격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 경기일보
- 5
덴류지(천룡사) (일본 교토)
당시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고려 사신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1339년 세운 교토의 선종 대사찰 덴류지에 머물렀다. 일본 조정은 정식 답서를 보내지 않았으나 막부는 승려 사신을 김일과 함께 고려에 보내 답례하였고(1368), 고려는 그 뒤에도 정몽주 등을 보내 왜구 단속을 거듭 요청하였다.
출처: 참고 자료 · 일본 고토뱅크 백과 · 영어 위키백과 · 유네스코 세계유산
- 6
부여 홍산현 관아 (부여군 홍산면)
1376년(우왕 2) 금강을 거슬러 올라온 왜구가 공주를 함락하고 연산 개태사까지 휩쓸자, 노장 최영이 자원해 출전하여 홍산에서 앞장서 돌격했고 적의 화살에 입술을 맞고도 물러서지 않아 크게 이겼다. 이 공으로 최영은 철원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지금 남아 있는 홍산현 관아 건물은 조선 후기에 지은 것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유산포털
- 7
합포성지 (창원 마산회원구 합성동)
합포는 1274년과 1281년 여몽 연합군이 일본 원정을 떠난 군항이자 경상도 해안 방어의 중심이었으나, 1374년(공민왕 23) 왜구의 기습으로 군영과 병선이 불타고 많은 군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에 고려는 1378년(우왕 4) 이곳에 성을 쌓았고, 조선 전기에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영이 이 성에 있다가 선조 때 진주로 옮겨 갔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8
진포 (금강 하구, 군산과 서천 사이)
1380년(우왕 6) 나세·심덕부·최무선이 이끈 전함 100여 척은 화통도감에서 만든 화포로 왜선을 모두 불태웠다. 배를 잃은 왜구는 내륙을 휩쓸며 떠돌다 얼마 뒤 남원 운봉의 황산에서 이성계에게 섬멸되었다.
출처: 『고려사』 권134 열전 우왕 6년 8월
- 9
함양 사근산성 (함양군 수동면 연화산)
1380년(우왕 6) 진포에서 배를 잃은 왜구는 충청도와 경상도 내륙을 휩쓴 뒤 사근내역에 진을 쳤고, 배극렴 등 9원수가 이를 쳤으나 크게 패해 원수 박수경·배언과 군사 500여 명이 전사했다. 기세가 오른 이 왜구는 얼마 뒤 남원 운봉을 넘어갔다가 황산에서 이성계에게 섬멸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인문학
- 10
남원 황산대첩비지 (운봉읍 화수리)
1380년 진포에서 최무선의 화포에 배를 잃은 왜구가 내륙을 휩쓸자 이성계는 운봉을 넘어 황산에서 이들을 크게 무찔렀는데, 적장 아지발도는 이성계의 화살에 투구를 잃은 뒤 이지란의 화살에 쓰러졌다. 1577년 승전을 기리는 황산대첩비가 세워졌으나 1945년 1월 일제가 파괴했고, 깨진 비석 조각은 지금 파비각에 보존되어 있다.
- 11
관음포 앞바다 (남해 고현면 차면리, 이락사 앞)
1383년(우왕 9) 왜선 120척이 경상도 연해로 쳐들어오자 해도원수 정지는 전선 47척을 이끌고 남해 관음포 앞바다의 박두양에서 맞서,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로 적선을 불태우며 크게 이겼다. 215년 뒤인 1598년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곳도 이 관음포 앞바다로, 해안에 그를 기리는 이락사가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유산포털
- 12
철령 (강원도 회양군·고산군 경계의 고개)
철령 북쪽은 원이 쌍성총관부를 두어 다스리다가 1356년 공민왕이 되찾은 땅이어서, 명은 옛 원의 영토라며 이곳에 철령위를 두겠다고 했다. 최영은 이에 맞서 요동 정벌을 밀어붙였으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권력을 잡았고, 명은 결국 이 요구를 거두고 철령위를 요동(지금의 중국 톄링)에 두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영어 위키백과
- 13
위화도 (압록강 하류)
우왕과 최영이 명의 철령위 설치 통보에 맞서 요동 정벌을 강행하자,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워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하고 최영을 제거하며 실권을 잡았다. 이 사건은 1392년 조선 건국으로 이어졌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영어 위키백과
- 14
최영 장군 묘 (고양 덕양구 대자동)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잡은 이성계 세력은 최영을 귀양 보냈다가 1388년 말 처형했다. 그는 '내게 탐욕이 있었다면 무덤에 풀이 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실제로 오랫동안 풀이 자라지 않아 '붉은 무덤(적분)'이라 불렸다고 전한다.
- 15
쓰시마 (대마도, 일본 나가사키현)
고려 말 왜구가 해안을 넘어 내륙까지 노략질하자 박위는 1389년(창왕 1) 쓰시마를 공격해 왜선 300척과 해안의 집들을 불태우고 붙잡혀 갔던 고려 사람 100여 명을 되찾아 왔다. 왜구의 근거지를 직접 친 이 원정에 이어, 조선 세종 때인 1419년에는 이종무가 다시 쓰시마를 정벌했다.
출처: 우리역사넷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2
- 16
우라소에 성터 (류큐 중산국 왕성, 일본 오키나와현 우라소에시)
찰도는 사신 옥지를 보내 신하를 칭하는 글과 함께 소목·후추 같은 토산물을 바쳤고, 고려도 답례 사신을 보내 두 나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류큐와의 교류는 조선 때 더욱 활발해졌다.
- 17
정몽주 묘 (용인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개경 선죽교에서 피살된 정몽주는 처음 개성 부근에 묻혔다가, 1406년 고향 경상도 영천으로 옮겨 가던 상여가 용인에 이르렀을 때 명정(죽은 이의 관직과 이름을 적은 깃발)이 바람에 날아가 떨어진 자리에 묻혔다고 전한다. 조선 왕조는 그를 충절의 상징으로 높여 1401년 영의정을 추증하고 1517년 문묘에 모셨다.
- 18
고양 공양왕릉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공양왕은 1392년 폐위되어 원주와 간성으로 쫓겨났다가 1394년 삼척에서 죽임을 당했다. 고양 원당동의 이 쌍릉은 왕과 왕비 순비 노씨의 무덤으로 사적에 지정되어 있으며, 삼척 근덕면 궁촌리에도 공양왕릉으로 전하는 무덤(도 기념물)이 따로 있다.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목록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참고한 자료
- 『고려사』 세가 공민왕·공양왕, 열전 신우(우왕)·최영·정지·박위·정몽주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총서 (황산 대첩·위화도 회군)
- 우리역사넷 (고려 말 왜구와 박위의 쓰시마 정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산대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음포대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화도회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철령'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마도정벌'
- 국가유산포털 '남원 황산대첩비지'
- 국가유산포털 '부여 홍산현 관아'
- 「고려 후기 왜구의 발생과 실체 검토」 (제주대학교 학위논문, 『고려사』 공민왕 23년 4월 기사 인용)
- 유네스코 세계유산 '상도 유적'
- 위키백과 '왜구'
- 위키백과 '고양 공양왕릉'
최종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