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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개혁과 신진 사대부 1351~1375년

원의 쇠퇴를 틈타 옛 땅을 되찾은 공민왕과 새로 자라난 신진 사대부

핵심 정리

이 단원의 장소: 2 화주 (조선 때의 영흥,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 3 파사부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주롄청(구련성) 일대), 4 공민왕릉 (현릉·정릉, 개성 서쪽 개풍 해선리), 6 창녕 옥천사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관룡사 아래), 7 범섬 (서귀포 법환동 앞바다), 8 괴시리 전통마을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9 포은 정몽주 유허비 (경북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10 회진현 거평부곡 (지금의 나주시 다시면, 회진성 터 기준)234678910
지도의 번호는 아래 장소 카드의 번호와 같습니다. 🌏 해외 장소 2곳은 지도 밖에 있습니다.

흔들리는 원과 공민왕의 반원 개혁

14세기 중엽 원나라는 황제 자리를 둘러싼 다툼과 잇따른 홍수·흉년으로 크게 약해졌습니다. 중국 곳곳에서 백성들이 들고일어났고, 붉은 두건을 둘러 홍건적이라 불린 무리도 이때 나타났습니다. 그 무렵인 1351년, 원의 수도에서 10년 동안 머물던 공민왕이 원 황실 출신의 왕비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돌아와 왕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고려 조정은 원과 가까운 사이를 이용해 높은 벼슬과 넓은 농장을 대대로 차지한 권문세족이 쥐고 있었습니다. 그 으뜸은 원 황제의 황후가 된 고려 여인 기씨, 곧 기황후의 오빠 기철 집안이었습니다.

1354년 원은 소금 장수 출신 장사성의 반란을 누르겠다며 고려에 군사를 청했습니다. 유탁·염제신·최영 등 장수 40여 명이 군사 2,000명을 이끌고 가서, 원의 으뜸 재상인 승상 톡토의 대군과 함께 장사성의 근거지 고우성1을 에워쌌습니다. 그해 겨울 성은 거의 함락될 뻔했지만, 원 조정이 갑자기 톡토를 물러나게 하는 바람에 포위가 무너졌습니다. 이 싸움에서 최영 등은 이름을 떨쳤고, 원이 안팎으로 얼마나 흔들리는지 직접 본 경험은 2년 뒤 공민왕의 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1356년 공민왕은 마침내 개혁에 나서 기철 일파를 한꺼번에 없애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했습니다. 정동행성은 원이 일본 원정을 준비하려고 고려에 둔 관청인데, 원정이 끝난 뒤에도 남아 원이 고려 정치에 끼어드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 안의 이문소는 죄를 다스리는 곳이었지만, 친원 세력이 이를 이용해 고려 사람을 함부로 붙잡아 벌주곤 했습니다. 공민왕은 원의 간섭으로 이름과 격이 낮아졌던 관청 제도도 옛 모습으로 되돌렸습니다.

빼앗긴 땅을 되찾다

같은 해 공민왕은 유인우 등을 동북쪽으로 보내 쌍성총관부를 쳤습니다. 쌍성총관부는 몽골과 싸우던 1258년에 들어선 관청입니다. 이 지역의 조휘·탁청이 고려 장수를 죽이고 화주와 그 북쪽 땅을 바치며 항복하자, 몽골이 그 땅을 직접 다스리려고 두었습니다. 고려군이 공격하자 이 지방의 유력자 이자춘과 그 아들 이성계가 안에서 호응했고, 고려군은 관청이 있던 화주2를 비롯한 땅을 약 100년 만에 되찾았습니다. 이 일로 이성계 집안은 고려 조정에 이름을 알렸고, 동북면에서 기른 군사의 힘은 훗날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는 밑천이 되었습니다.

서북쪽에서는 인당 등이 압록강을 건너 원의 역참 여덟 곳, 곧 8참을 공격했습니다. 역참은 나라의 명령을 전하고 사신이 오가도록 길목마다 말과 숙소를 갖춰 둔 곳입니다. 고려군은 지금의 중국 단둥 북동쪽에 있던 파사부3 등 세 곳을 깨뜨렸습니다. 원이 크게 반발하자 공민왕은 그 책임을 인당에게 돌려 처형하고 원을 달랬습니다. 원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일은 피하면서도 동북쪽에서 되찾은 땅은 지켜 낸 것입니다.

신돈의 개혁과 원·명의 교체

개혁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359년과 1361년에는 홍건적이 쳐들어와 한때 개경까지 빼앗겼고, 1364년에는 원이 공민왕을 몰아내려고 보낸 군대를 최영·이성계 등이 물리쳐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1365년 왕비 노국대장공주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 황실 출신이면서도 늘 공민왕 곁을 지켜 온 왕비였기에 왕의 슬픔은 무척 컸습니다. 공민왕은 왕비의 무덤인 정릉을 정성껏 꾸미고 그 곁에 자신이 묻힐 현릉까지 마련했습니다. 이 현릉은 태조 왕건의 현릉과 이름의 소리만 같은 다른 무덤입니다. 개성 서쪽에 나란히 남은 두 무덤, 곧 공민왕릉4은 고려 왕릉 가운데 가장 잘 남은 것으로 꼽힙니다.

슬픔에 잠긴 공민왕은 권세 있는 가문과 얽히지 않은 승려 신돈에게 나랏일을 맡겼습니다. 『고려사』에는 신돈의 어머니가 지금의 경남 창녕에 있던 옥천사6의 여종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신돈은 1366년 전민변정도감을 두었습니다. 권세가가 억지로 빼앗은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양인, 곧 노비가 아닌 보통 백성으로 되돌려 주는 관청입니다. 백성들은 크게 반겼지만, 땅과 노비를 내놓게 된 권문세족은 신돈을 몹시 미워했습니다. 신돈의 힘이 지나치게 커지자 공민왕도 그를 멀리했고, 신돈은 1371년 반역을 꾀했다는 죄로 처형되었습니다. 옥천사도 그 뒤 문을 닫았다고 전합니다.

1368년 홍건적 무리에서 일어난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고 원의 수도를 차지하자, 원은 북쪽 초원으로 물러났습니다. 이렇게 물러난 원을 북원이라 부릅니다. 공민왕은 명과 관계를 맺는 한편 이 틈에 요동으로 군대를 보냈습니다. 요동에서는 기철의 아들 기사인테무르가, 1290년 서경에서 이곳으로 옮겨 간 원의 동녕부를 근거지로 고려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1370년 겨울 지용수·이성계 등은 원이 요동을 다스리던 중심 성인 요성5을 함락했습니다. 고려군은 요동과 심양 일대가 본래 고려 땅이라는 글을 내걸었지만, 오래 머물지 않고 곧 돌아왔습니다.

남쪽 제주에는 원이 목장을 두고 말을 기르게 한 몽골 사람들이 남아 있었는데, 이들을 목호라고 불렀습니다. 명이 고려에 제주 말을 바치라고 하자, 목호들은 말을 내놓지 않겠다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1374년 공민왕의 명령을 받은 최영이 2만 5천여 명의 군사로 이들을 잇달아 무찌르자, 쫓기던 목호 세력은 서귀포 앞바다의 범섬7으로 달아났다가 무너졌습니다. 그해 가을 공민왕은 곁에서 모시던 사람들에게 시해되었습니다. 시해는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일을 말합니다. 공민왕은 왕비 곁의 현릉에 묻혔고, 어린 우왕이 뒤를 이었습니다.

새로 자라난 신진 사대부

공민왕의 개혁을 뒷받침한 또 하나의 힘은 신진 사대부였습니다. 이들은 주로 지방 관청의 일을 보던 향리나 중소 지주 집안에서 나와 과거를 거쳐 벼슬에 오른 새 관리들로, 성리학을 공부했습니다. 성리학은 송나라 주희가 정리한 새로운 유학으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와 세상의 이치를 깊이 따지는 학문입니다. 신진 사대부의 중심에는 1328년 외가 마을인 지금의 경북 영덕 괴시리8에서 태어난 이색이 있었습니다. 원의 과거에도 합격한 이색은 1367년 공민왕이 다시 세운 성균관, 곧 나라의 가장 높은 교육 기관을 이끌며 젊은 학자들과 함께 성리학을 가르치고 토론했습니다.

정몽주는 1337년 지금의 경북 영천 임고면 우항리9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그는 이색에게서 '동방 이학의 시조'라는 평을 들을 만큼 성리학에 밝았습니다. 이학은 성리학을 달리 부르는 말입니다. 공민왕이 죽은 뒤 권력을 잡은 이인임 등은 북원과 다시 가까워지려 했습니다. 이색의 제자 정도전은 이에 맞서 1375년 북원 사신을 맞아들이는 일에 반대하다가, 나주 회진현의 거평부곡10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부곡은 일반 고을보다 낮은 대우를 받던 특수한 마을입니다. 정도전은 1377년까지 그곳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백성의 고단한 삶을 보았고, 이 경험은 훗날 그가 펼친 개혁 구상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연표

  1. 1351년 공민왕이 원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름
  2. 1354년 원의 요청으로 출병한 고려군이 장사성의 고우성 포위에 참여
  3. 1356년 기철 일파 숙청과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쌍성총관부 수복과 8참 공격
  4.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세상을 떠나고, 신돈이 나랏일을 맡음
  5. 1366년 신돈이 전민변정도감을 둠 (신돈은 1371년 처형됨)
  6. 1370년 지용수·이성계 등이 요동의 요성을 함락
  7. 1374년 최영이 제주 목호의 난을 진압하고, 공민왕이 시해됨
  8. 1375년 정도전이 북원 사신 영접에 반대하다 나주 거평부곡으로 유배됨

이 단원의 장소

  1. 1

    고우 (오늘날 중국 장쑤성 가오유시, 옛 성 일대)

    1354년 · 난이도 ★★★ · 🌏 지도 밖

    톡토의 대군은 1354년 겨울 고우성을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원 조정이 갑자기 톡토를 해임하면서 포위가 무너졌다. 이 출병에서 최영 등은 이름을 떨쳤고, 원의 쇠약함을 직접 본 경험은 1356년 공민왕의 반원 개혁으로 이어졌다.

    출처: 영어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2 · 위키백과

  2. 2

    화주 (조선 때의 영흥,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

    1356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쌍성총관부는 1258년(고종 45) 조휘·탁청이 동북면병마사를 죽이고 화주 이북 땅을 들어 몽골에 항복하면서 설치되어 약 100년 동안 원이 직접 다스렸다. 1356년 수복 때 이 지역의 유력자 이자춘·이성계 부자가 고려에 호응했고, 이는 훗날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는 세력 기반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 영어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2

  3. 3

    파사부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주롄청(구련성) 일대)

    1356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공민왕은 1356년 친원 세력인 기철 일파를 숙청하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없앤 데 이어, 인당 등을 보내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 등 8참 가운데 3참을 깨뜨렸다. 원이 크게 반발하자 공민왕은 그 책임을 인당에게 돌려 처형했으며, 파사부는 지금의 단둥시 북동쪽 주롄청(구련성) 일대로 본다.

    출처: 영어 위키백과 · 참고 자료 · 위키백과

  4. 4

    공민왕릉 (현릉·정릉, 개성 서쪽 개풍 해선리)

    1365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원 황실 출신인 노국대장공주가 1365년 아이를 낳다 세상을 떠나자 공민왕은 크게 슬퍼하며 정릉을 조성하고 그 곁에 자신의 현릉을 마련했으며, 1374년 시해된 뒤 이곳에 묻혔다. 고려 왕릉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있는 무덤으로 꼽히며, 2013년 '개성 역사 유적 지구'의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올랐다.

    출처: 영어 위키백과 · 유네스코 세계유산 · 위키백과

  5. 5

    요성 — 원 요양행성의 치소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 시가지)

    1370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 🌏 지도 밖

    원·명 교체기를 틈타 공민왕은 1370년 두 차례 요동으로 군대를 보내, 1월에는 이성계가 동녕부의 우라산성을 함락했고 겨울에는 지용수·이성계 등이 원 요양행성의 치소인 요성(오늘날 랴오양)을 함락했다. 고려군은 요동과 심양 일대가 본래 고려 땅이라는 방을 내걸었으나 오래 머물지 않고 곧 군사를 돌렸다.

    출처: 참고 자료 ·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6. 6

    창녕 옥천사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관룡사 아래)

    1371년 · 난이도 ★★★

    『고려사』 열전에는 신돈의 어머니가 옥천사의 여종이었다고 적혀 있으며, 화왕산·관룡산 자락의 창녕 옥천리 절터에는 높은 축대와 석탑·석등 부재가 남아 있다. 신돈이 1371년 역모 혐의로 처형된 뒤 이 절도 폐사되었다고 전한다.

    출처: 위키백과 · 참고 자료 · 참고 자료 2 · 매일신문 · 국가유산포털

  7. 7

    범섬 (서귀포 법환동 앞바다)

    1374년 · 난이도 ★★☆

    원이 탐라에 목장을 두고 말을 기르게 한 목호들은 명이 제주 말을 바치라고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공민왕은 1374년 최영에게 2만 5천여 명의 군사를 주어 토벌하게 했다. 명월포에 상륙한 고려군에 잇달아 패한 목호 세력이 범섬으로 달아나자, 최영은 배로 섬을 에워싸 반란을 끝냈다.

    출처: 위키백과 · 위키백과 2

  8. 8

    괴시리 전통마을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1328년 · 난이도 ★★★

    이색의 아버지 이곡이 영해 사람과 혼인해, 이색은 외가가 있던 영해부 호지마을(지금의 괴시리)에서 태어났다. 원에서 돌아온 이색이 마을 풍경이 중국의 괴시와 닮았다 하여 이름을 '괴시'로 바꾸었다고 전하며, 지금은 영양 남씨 집성촌으로 조선 후기 고택들이 남아 있다.

    출처: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9. 9

    포은 정몽주 유허비 (경북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1337년 · 난이도 ★★★

    정몽주는 지금의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며, 그가 태어난 터에 그를 기리는 유허비가 세워졌다. 가까이에는 1553년 그를 기려 세운 임고서원이 있다.

    출처: 위키백과 · 위키백과 2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목록

  10. 10

    회진현 거평부곡 (지금의 나주시 다시면, 회진성 터 기준)

    1375년 · 난이도 ★★★

    정도전은 이인임 등 권신들의 친원 정책에 반대하다 나주 회진현의 거평부곡으로 유배되어 1377년까지 지냈다. 이때 쓴 「소재동기」 등에는 부곡 사람들과 어울리며 백성의 처지를 보고 품은 생각이 담겨 있어, 훗날 그가 펼친 개혁 구상의 바탕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출처: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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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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