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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간섭기의 고려 1270~1351년

원의 간섭 속에 일본 원정에 동원되고 왕이 원을 오간 80여 년

핵심 정리

이 단원의 장소: 1 자비령 (황해북도 황주와 서흥 사이의 고개), 4 수산평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일대), 5 서귀포 법화사지 (제주 서귀포시 하원동), 7 원주 영원산성 (치악산 남쪽 자락, 고려 때의 치악성), 12 대청도 (인천 옹진군 대청면), 13 금강산 장안사 터 (북한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14571213
지도의 번호는 아래 장소 카드의 번호와 같습니다. 🌏 해외 장소 8곳은 지도 밖에 있습니다.

원의 사위 나라가 된 고려

1270년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온 뒤, 고려는 80여 년 동안 원의 간섭을 받았습니다. 몽골은 이듬해인 1271년 나라 이름을 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원은 고려 땅 일부를 떼어 내 직접 다스리기도 했습니다. 1269년 최탄 등이 반란을 일으켜 서경(평양)을 비롯한 북쪽 고을들을 몽골에 바치자, 몽골은 이듬해 서경에 동녕부라는 관청을 두고 황해도의 고개 자비령1을 경계로 삼았습니다. 충렬왕이 거듭 요청한 끝에 원은 1290년 동녕부를 요동으로 옮기고 이 땅을 돌려주었습니다. 동북쪽 화주에는 몽골과 싸우던 1258년부터 쌍성총관부가 있었고, 삼별초가 무너진 제주에도 탐라총관부가 들어섰습니다.

1274년 세자(뒷날의 충렬왕)가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과 혼인한 뒤로, 고려 왕은 대대로 원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 원 황제의 사위, 곧 부마가 되었습니다. 왕의 칭호도 태조·광종 같은 '조'·'종' 대신 '왕'으로 낮아졌고, 원에 충성한다는 뜻의 '충' 자가 붙었습니다. 태자는 세자로 바뀌고 관청의 이름과 격도 낮아졌습니다. 원은 공녀, 곧 원에 바칠 여성을 요구했고 매와 인삼 같은 특산물도 거두어 갔습니다.

원의 전쟁에 휘말린 고려

쿠빌라이는 바다 건너 일본도 굴복시키려 했습니다. 1268년부터 고려 사신을 시켜 몽골을 섬기라는 황제의 편지(국서)를 보냈지만, 일본의 무사 정권인 가마쿠라 막부2는 끝내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원은 고려에 배와 군사를 내라고 강요했습니다. 고려는 배 900척을 만들고, 김방경이 이끄는 군사 약 8천 명을 보냈습니다. 1274년 원과 고려의 연합군은 규슈의 하카타만3에 상륙해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배로 물러난 뒤 폭풍을 만나 큰 피해를 입고 돌아왔습니다. 막부는 이듬해 다시 항복을 요구하러 온 원의 사신을 처형하고, 바닷가에 돌벽을 쌓아 다음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그사이 원이 직접 다스리던 제주는 말 목장이 되었습니다. 1276년 원이 보낸 감독관인 다루가치가 몽골 말 160필을 들여와 수산평4에 풀어 기른 것이 그 시작입니다. 이때 들어온 몽골인 목자, 곧 목호들은 섬에 남아 있다가 1374년 난을 일으켰습니다. 서귀포의 법화사5 터에서는 원의 연호(해를 세는 이름)로 '지원 6년(1269)에 다시 짓기 시작해 16년(1279)에 마쳤다'고 새긴 기와가 나왔습니다. 공사를 마친 1279년은 원이 제주를 직접 다스리던 때였습니다.

원은 1280년 두 번째 원정을 준비하려고 고려에 정동행성이라는 관청을 두었습니다. 이 관청은 원정이 끝난 뒤에도 남아 고려 정치에 간섭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1281년 합포(지금의 창원)에서 떠난 동로군과, 원에 망한 남송의 군사로 꾸린 강남군이 다시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돌벽에 막혀 상륙하지 못하고 바다에 머물던 함대가 다카시마6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무너졌습니다. 배를 만들고 군량을 대야 했던 두 차례의 원정 준비는 고려 백성에게 큰 짐이 되었습니다.

원 안의 다툼도 고려로 번졌습니다. 원 황실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몽골 왕족 합단의 무리가 1290년 고려 동북쪽으로 쳐들어와, 이듬해 정월 원주까지 내려왔습니다. 원주의 선비 원충갑은 고을 사람들과 함께 치악산 자락의 영원산성7을 지키며 여러 차례 적을 물리쳤습니다. 합단 군은 그해 5월 연기(지금의 세종)에서 고려와 원의 연합군에게 크게 지고 물러갔습니다.

원을 오간 왕, 충선왕

이 시기 고려의 세자들은 원의 수도에서 자라는 일이 많았고, 왕이 된 뒤에도 원을 오갔습니다. 충렬왕과 원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충선왕은 1298년 왕위에 올랐다가 원의 명령으로 몇 달 만에 물러났습니다. 원에 머물던 그는 1307년 원 무종이 황제 자리에 오르는 것을 도왔고, 그 공으로 이듬해 심양왕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몽골 침입 때 항복하거나 끌려간 고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던 원의 고을 심양8의 이름을 딴 칭호였습니다. 같은 해 충렬왕이 세상을 떠나자 충선왕은 고려 왕위에도 다시 올랐습니다. 심양왕 칭호는 1310년 심왕으로 바뀌었습니다.

다시 왕이 된 뒤에도 원에 머물며 글로 명령을 보내 나라를 다스리던 충선왕은, 1313년 아들 충숙왕에게 왕위를 넘겼습니다. 이듬해 그는 원의 수도 연경9(지금의 베이징)에 '책 만 권을 갖춘 집'이라는 뜻의 만권당을 세우고, 고려에서 이제현 등을 불러 조맹부 같은 원의 이름난 학자들과 사귀게 했습니다. 이 교류로 고려 학자들은 앞서 안향이 들여온 성리학, 곧 송나라 주희가 정리한 새 유학을 더 깊이 익혔고, 조맹부의 글씨체인 송설체도 고려에 퍼졌습니다. 이제현은 1316년 충선왕의 명을 받아 중국 서남쪽 쓰촨 지방의 불교 명산 아미산10까지 가서 향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충선왕을 아끼던 원 인종이 1320년 세상을 떠나자 처지가 바뀌었습니다. 그해 충선왕은 불경을 공부하라는 명목으로 머나먼 티베트의 사캬11로 귀양을 갔습니다. 이곳에는 원 황제의 스승을 대대로 낸 불교 종파의 중심 절이 있었습니다. 그사이 원에 붙은 고려 사람들은 심왕 자리를 물려받은 충선왕의 조카 왕고를 충숙왕 대신 왕으로 세우려 했고, 고려를 원의 한 지방으로 만들자고까지 했습니다. 충선왕은 1323년 황제가 다시 바뀐 뒤에야 풀려나 1325년 원의 수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황후와 권문세족

고려의 섬은 원 황실 사람들의 귀양지로도 쓰였습니다. 1330년 원 황실의 권력 다툼에 밀려난 토곤 테무르는 서해의 대청도12로 귀양을 왔고, 1333년에는 원의 황제(순제)가 되었습니다. 순제는 공녀로 원에 간 고려 여인 기씨를 황후로 세웠습니다. 기황후는 황실의 재물과 장인을 보내 1343년 금강산의 장안사13를 크게 다시 짓게 했습니다. 그 내력은 공녀를 그만 뽑아 달라고 원에 건의했던 고려 학자 이곡이 1345년 비문으로 남겼습니다. 이 무렵 원에서는 고려의 옷과 음식이 유행했고(고려양), 고려에서는 충렬왕 때부터 머리 일부를 깎고 땋는 변발과 몽골 옷 같은 몽골의 풍습, 곧 몽골풍이 퍼졌습니다.

기황후의 오빠 기철을 비롯한 기씨 일족은 원의 힘을 등에 업고 고려에서 세도를 부렸습니다. 이 시기의 지배 세력인 권문세족은 높은 벼슬을 대대로 차지하고 넓은 농장을 거느렸는데, 기씨 일족이 그 대표였습니다. 충렬왕부터 충혜왕까지 여러 왕이 원의 뜻에 따라 물러났다가 다시 오르기도 했습니다. 백성을 지나치게 수탈한다는 비난을 받던 충혜왕은 1343년 원의 사신에게 붙잡혀 끌려갔고, 남쪽 멀리 광둥 지방으로 귀양 가던 길에 이듬해 정월 악양14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뒤를 이은 어린 충목왕 때인 1347년에는 정치도감이라는 관청을 두어 권세가가 빼앗은 땅과 노비를 되돌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기씨 일족의 반발로 개혁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351년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원이 약해진 틈을 타 이런 현실을 바꾸려 나섰습니다.

연표

  1. 1270년 서경에 동녕부가 들어서고 자비령이 원과의 경계가 됨 (1290년 돌려받음)
  2. 1274년 세자(충렬왕)가 원 공주와 혼인, 원과 고려 연합군의 1차 일본 원정
  3. 1281년 2차 일본 원정, 다카시마 앞바다에서 함대가 태풍에 무너짐
  4. 1291년 원충갑이 원주 영원산성에서 합단 군을 물리침
  5. 1314년 충선왕이 원의 수도 연경에 만권당을 세움
  6. 1320년 충선왕이 티베트의 사캬로 귀양을 감
  7. 1333년 대청도에 귀양 왔던 토곤 테무르가 원 황제(순제)가 됨
  8. 1344년 원으로 끌려간 충혜왕이 귀양길에 악양에서 숨짐

이 단원의 장소

  1. 1

    자비령 (황해북도 황주와 서흥 사이의 고개)

    1270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1269년 최탄 등이 반란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 54성과 자비령 이북의 서해도 6성을 몽골에 바치자, 몽골은 이듬해 서경에 동녕부를 두고 자비령을 경계로 삼았다. 충렬왕이 거듭 요청한 끝에 원은 1290년 동녕부를 요동으로 옮기고 그 땅을 고려에 돌려주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2. 2

    가마쿠라 (가마쿠라 막부의 근거지, 쓰루가오카하치만구 일대, 일본 가나가와현)

    1274년 · 난이도 ★★☆ · 🌏 지도 밖

    가마쿠라 막부는 1268년부터 고려 사신이 전한 몽골의 국서에 답하지 않았고, 1275년에는 항복을 요구하러 온 원의 사신 두세충 일행을 처형하였다. 고려는 원의 강요로 배와 군사를 내 두 차례 원정에 동원되었으며, 원정은 실패했지만 막부도 방어 부담으로 약해져 1333년 무너졌다.

    출처: 영어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2 · 영어 위키백과 3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3

    하카타만 (일본 후쿠오카)

    1274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 🌏 지도 밖

    원의 강요로 고려는 900척의 배를 만들고 김방경이 이끄는 군사 약 8천 명을 보냈으며, 연합군은 쓰시마·이키섬을 거쳐 하카타만 일대에 상륙해 싸우다 배로 물러난 뒤 폭풍을 만나 큰 피해를 입었다. 1281년 2차 원정 때는 일본이 해안에 새로 쌓은 석축에 막혀 상륙하지 못하고 태풍까지 겹쳐 실패했으며, 두 차례 원정 준비는 고려에 큰 부담을 안겼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참고 자료 · 영어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2 · 참고 자료 2

  4. 4

    수산평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일대)

    1276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삼별초를 진압한 원은 제주(탐라)를 직접 다스리며 섬을 말 목장으로 삼았는데, 1276년 다루가치 탑라치가 수산평에 몽골 말을 풀어 기른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후 제주에 자리 잡은 몽골인 목자(목호)들은 원의 세력이 약해진 뒤에도 남아 1374년 목호의 난을 일으켰다.

    출처: 위키백과 · 위키백과 2 · 뉴시스 · 참고 자료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목록

  5. 5

    서귀포 법화사지 (제주 서귀포시 하원동)

    1279년 · 난이도 ★★★

    법화사지에서는 '至元六年己巳始重創 十六年己卯畢'(지원 6년인 1269년에 다시 짓기 시작해 16년인 1279년에 마침)이라고 새긴 기와가 나왔다. 공사를 마친 1279년은 원나라가 삼별초를 누른 1273년부터 탐라를 직접 다스리던 때였다. 조선 태종 때인 1406년에는 명나라 사신 황엄이 이 절의 아미타삼존불상을 요구해 명으로 가져갔다.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목록 · 위키백과

  6. 6

    다카시마(鷹島) 고자키 해저 유적 (일본 나가사키현 마쓰우라시)

    1281년 · 난이도 ★★★ · 🌏 지도 밖

    2차 원정에는 합포에서 출발한 동로군(몽골군·한군·고려군)과 옛 남송 군사로 꾸린 강남군이 나섰으나, 다카시마 일대에 모여 있던 함대가 태풍에 무너져 원정은 실패했다. 이 해역은 2012년 일본 최초의 수중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출처: 영어 위키백과 · 참고 자료 · 영어 위키백과 2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참고 자료 2

  7. 7

    원주 영원산성 (치악산 남쪽 자락, 고려 때의 치악성)

    1291년 · 난이도 ★★★

    1290년 동북면으로 쳐들어온 합단 군은 이듬해 정월 원주를 공격했으나, 원충갑이 치악성(영원산성)을 지키며 거듭 이겨 적의 기세를 꺾었다. 남쪽으로 방향을 돌린 합단 군은 그해 5월 연기(지금의 세종) 일대에서 고려와 원의 연합군에게 크게 패해 물러갔다.

    출처: 위키백과 · 위키백과 2

  8. 8

    심양 — 원 심양로의 치소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 선양 옛 성 안)

    1308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 🌏 지도 밖

    원은 이곳 일대에 고려 출신 주민을 다스리는 안무고려군민총관부를 두었고, 1307년 무종 즉위를 도운 충선왕은 이듬해 심양왕에 봉해졌다가 1310년 심왕으로 올랐다. 1316년 이 칭호를 물려받은 조카 왕고(연안군)를 고려 왕으로 세우려는 심왕 옹립 운동이 일어나 충숙왕 때 왕위 다툼이 이어졌다.

    출처: 위키백과 · 참고 자료 · 영어 위키백과

  9. 9

    연경 (원의 수도 대도, 지금의 베이징)

    1314년 · 난이도 ★☆☆ · 한능검 빈출 · 🌏 지도 밖

    충선왕은 1313년 충숙왕에게 왕위를 넘긴 뒤 원의 수도 연경에 머물며 1314년 만권당을 세우고, 이제현을 불러 조맹부 등 원의 학자들과 교유하게 했다. 이 교류를 통해 고려의 성리학 수용이 깊어지고 조맹부의 송설체 서풍이 고려에 퍼졌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 영어 위키백과 · 참고 자료

  10. 10

    아미산(어메이산) 정상 금정 일대 (중국 쓰촨성 어메이산시)

    1316년 · 난이도 ★★★ · 🌏 지도 밖

    이제현은 1316년(충숙왕 3) 충선왕의 명으로 원의 수도를 떠나 성도(청두)를 거쳐 서촉의 아미산에 가서 제사를 올렸고, 오가는 길에 지은 기행 시문이 『익재난고』에 전한다. 『고려사』 열전은 그가 서촉에 사신으로 가서 이르는 곳마다 지은 시가 사람들 입에 널리 오르내렸다고 적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참고 자료 · 중국어 위키문헌 · 영어 위키백과

  11. 11

    사캬 사원 (고려사의 '살사결', 중국 티베트 자치구 시가체시 사캬현)

    1320년 · 난이도 ★★★ · 🌏 지도 밖

    『고려사』는 충선왕의 유배지를 대도에서 1만 5천 리 떨어진 토번(티베트)의 '살사결(撒思結)'로 적는데, 이는 팍파 이래 원의 제사를 배출한 사캬파의 근거지 사캬로 본다. 충선왕은 1323년 타사마(朶思麻, 지금의 칭하이·간쑤 일대)로 옮겨졌다가 원 태정제가 즉위한 뒤 풀려나 대도로 돌아왔고, 1325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참고 자료 · 영어 위키백과 · 영어 위키백과 2

  12. 12

    대청도 (인천 옹진군 대청면)

    1330년 · 난이도 ★★★

    원 간섭기 고려의 섬들은 원 황실과 귀족의 유배지로도 쓰였는데, 대청도에 유배되었던 토곤 테무르는 1333년 황제(순제)에 올랐다. 그는 고려 출신 공녀였던 기씨를 황후로 세웠고, 그 오빠 기철 등 기씨 일족의 세도는 1356년 공민왕이 이들을 숙청할 때까지 고려를 흔들었다.

    출처: 영어 위키백과 · 위키백과

  13. 13

    금강산 장안사 터 (북한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1343년 · 난이도 ★★★

    금강산 4대 사찰의 하나인 장안사는 승려 굉변이 중흥을 발원하자 기황후가 황제와 황태자의 복을 빌며 중창을 후원했고, 이곡이 1345년에 지은 「금강산장안사중흥비」가 그 내력을 전한다. 6·25 전쟁 때 폭격으로 건물이 모두 불타 지금은 터만 남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참고 자료 · 영어 위키백과 · 위키백과

  14. 14

    악양 (오늘날 중국 후난성 웨양시, 악양루 일대 옛 성)

    1344년 · 난이도 ★★★ · 🌏 지도 밖

    원 황제는 백성을 지나치게 수탈했다는 죄를 물어 충혜왕을 광둥 지방의 게양현으로 귀양 보냈으나, 왕은 1344년 정월 악양현(지금의 웨양)에서 숨졌다. 고려에서는 어린 아들 충목왕이 뒤를 이었다.

    출처: 영어 위키백과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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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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